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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0169
한자 支石墓
영어음역 goindol
영어의미역 dolmen
이칭/별칭 지석묘,대개석묘,돌멘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선사/청동기
집필자 강창화김동전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지역에서 거대한 돌을 이용해 만든 선사 시대 거석 기념물의 일종.

[개설]

고인돌은 대부분이 묘제이나, 일부는 집단의 의식 장소나 의식을 행하는 제단(기념물)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한국에서는 ‘고인돌’, 일본에서는 ‘지석묘(支石墓)’, 중국에서는 ‘대개석묘(大蓋石墓)’, 유럽에서는 대체로 ‘거석 기념물’ 또는 ‘돌멘(Delmen)이라고 부른다.

고인돌의 일반적인 정의는 땅 속이나 땅 위에 돌로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무덤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묘제이다. 우리나라 고인돌의 형식은 크게 북방식·남방식·개석식으로 분류된다.

북방식 고인돌은 ‘탁자식’으로도 불린다. 네 개의 판석을 세워서 장방형 돌방을 만든 후,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돌을 뚜껑돌로 올려놓은 형식이다. 유해가 매장된 돌방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다.

남방식 고인돌은 ‘바둑판식’으로도 불린다. 판석·할석·천석 등을 사용하여 지하에 돌방을 만들고 뚜껑돌과 돌방 사이에 3, 4매의 받침돌이 있는 형식이다. 보통 매장유해가 묻힌 곽을 덮는 뚜껑돌이 있는 것이 보편적이다.

개석식 고인돌은 뚜껑돌과 각종 지하 돌방 사이에 받침돌 없이 뚜껑돌로 직접 돌방을 덮고 있는 형식이다. ‘무지석식’이라고도 하며, 크게는 남방식 고인돌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분류 기준을 그대로 제주 고인돌에 적용하기는 곤란한 실정이다. 한반도 고인돌의 형식 분류와는 시기적·형태적으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탐라 형성기의 대표적인 묘제가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일정한 인구의 규모, 이에 따른 취락의 형성, 본격적인 농경과 협업체의 구성, 불평등 사회 구조 등의 배경에서 축조되기 시작하였다.

[분포]

제주도 고인돌은 대부분 단독으로 자리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군을 이룬다고 하더라도 고인돌 간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그 분포 지역은 해발 100m 미만의 해안 지역에 밀집되어 있다. 제주시를 비롯하여 서북부와 서남부 지역에 주로 분포하고 동남부에는 매우 드물다. 용담동 고인돌·오라 고인돌·도련 고인돌·삼양 고인돌·외도 고인돌·광령 고인돌·하귀 고인돌·창천 고인돌·신례리 고인돌 등이 시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형식]

하나의 사회 구조를 갖춘 탐라 형성기의 삼양동 마을 유적에 자리한 고인돌은 지하 매장 주체를 둔 2톤 미만의 개석식 고인돌이 주류를 이룬다. 여기서는 이청규의 제주도 고인돌 형식 분류안과 편년 체제를 전재하고자 한다. 최근에 고인돌 하부 구조에 대한 조사가 오라동·광령리·옹포리·가파도 지역에서 진행되었으나, 아직 이청규의 형식 분류와 편년 체제를 수정하여 보완할 만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주도 고인돌의 형식 분류에 기준이 되는 것은 매장부의 위치와 지석의 고임 방식이다. 매장부의 위치는 시신을 매장하는 곳을 지하에 둘 것인지, 지상에 둘 것인지의 문제이다. 이것은 지석묘의 축조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이다.

지상형은 높이가 높은 지석을, 지하형은 높이가 낮은 지석을 사용한다. 그리고 반지상형은 상석 양 모서리에 작은 지석을 고여 아치 모양을 이루거나 때로는 지석 자체가 한 쪽은 높고, 다른 한 쪽은 낮은 것을 필요로 한다.

지석의 고임 방식은 곧 상석을 올리는 방식이 된다. 매장 시설 상부에 지석의 유무에 따른 구분이다. 지석을 고였다면 판석형인지 괴석형인지도 중요한 요소가 된다. 두툼한 괴석 위에 상석을 올리는 것보다 높이가 높은 판석 위에 상석을 올리는 것이 더 복잡한 축조 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와 같은 매장 시설의 위치와 지석의 고임 상태를 기준으로 제주도 고인돌을 분류하면 대체로 6가지 형식으로 구분될 수 있다. 1형식은 지석 없이 상석이 지표에 바로 닿는 개석식 또는 무지석식 고인돌이다. 2형식은 남방식 유형에 속하나, 전형적인 남방식에 비해 지석 대부분을 제대로 다듬지 않은 할석을 사용하였다. 또한 지석의 숫자는 3~10매로 그 예가 다양하다.

3형식은 상석 한 쪽이 들려서 하부 매장부가 지상에 드러나 있고, 그 좌우와 들리지 않은 뒤쪽에 지석이 고인 형식이다. 들린 부분의 모양은 대체로 아치형을 취하고 있다. 4형식은 지석이 이중으로 고인 형식이다. 비탈면을 이용하여 한 쪽은 작은 할석이 받쳐져 있다.

5형식은 비탈면을 이용하여 높은 곳은 할석과 괴석을 고이고, 낮은 곳은 판석을 고인 형식이다. 6형식은 상석 밑을 완전하게 판석형 지석으로 에워싸 고인 형식이다. 지상에 장방형 또는 원형의 석실을 만든 것으로 보이는 형식이다.

대체로 1·2형식은 매장부의 위치가 지하형이고, 3·4·5형식은 축조된 지형과 축조 방법으로 보아 반지상형일 가능성이 많다. 5·6형식은 지상형으로 정리된다.

[출토유물과 연대]

고인돌의 축조시기를 판단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부장 유물이다. 한반도 육지부의 경우, 고인돌의 출토 유물은 마제 석검·비파형 동검·세형 동검·홍도·무문 토기 등이 있다. 이러한 유물은 그 연대가 대체로 청동기 시대에서 초기 철기 시대까지로 편년된다. 그러나 제주도의 경우, 시기적으로 앞선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다소 후행할 것으로 판단된다.

지하형인 2형식의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토기 중에는 대체로 곽지리식 토기에 속하는 것은 있어도 회색 경질 토기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그리고 3형식의 고인돌인 광령리 23호 고인돌에서 직립 구연 발형 토기 구연부가 비교적 많이 출토되었다. 직립 구연 발형 토기는 곽지리식 토기와 공반하지만, 곽지패총 2지구 제3층 아래층에서 초기 철기 시대 순수 구멍무늬 토기와 공반하여 나타나므로, 이른 단계일 가능성이 있다.

용담동 무덤의 남쪽 묘역에 있는 석곽 무덤에서는 무문 토기가 출토되었다. 그 석곽 무덤은 고인돌과 같은 단계에 축조된 무덤이거나 원래 상석이 있는 1유형인 개석식 고인돌일 가능성도 있다. 다시 말해, 제주도 고인돌의 축조 상한을 초기 철기 시대까지 올려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고인돌의 거의 대부분에서 곽지1식 토기가 공반하기 때문에 제주 고인돌의 축조 시기가 곽지리식 토기 사용 시기와 맞물리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5·6형식의 고인돌에서는 적어도 3세기 초반 이후의 회색 경질 토기가 출토되므로 지상형 제주도식 고인돌이 보다 늦은 단계의 것으로 이해된다.

[특징]

고인돌의 축조는 다수의 인원 동원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피장자의 위치를 해석할 필요성이 있다. 다수의 인원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은 일정한 권위에 의해서 강제된 것이다. 반대로 자발적인 협업 체제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전자의 입장은 고인돌의 피장자는 우월한 지위에 있는 족장 또는 수장이라는 해석이 될 수 있다. 반면에, 후자의 입장은 모든 피장자가 우월한 지위에 있는 족장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이다.

제주도 내 고인돌의 축조 기간을 탐라 전기로 잡고 마을 구성원이 모두 고인돌 묘제를 채택했다면, 그 수는 실로 엄청날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고인돌의 분포가 한정적이고 밀집된 곳이라도 10~20여 기에 불과함으로, 고인돌 피장자는 적어도 마을 구성원 중 일정한 지위에 있는 신분임은 분명하다.

제주도 고인돌 중 가장 발전한 판석 모양 지석을 가진 6형식은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특수형이다. 이러한 고인돌 형식은 제주시 한천 변과 외도천 변이라는 일정한 지역에 한정되어 있다. 이러한 유형의 고인돌은 분명히 제주도의 다른 형식의 고인돌보다 많은 동력과 전문 인력이 동원되어서 축조된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러한 제주도식 고인돌의 피장자는 우월한 지위에 있는 족장층에 버금가는 신분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러한 형식의 고인돌의 분포를 통해 당시 가장 번창했던 마을 또는 중심이 되는 마을을 추정할 수도 있다.

상석의 규모는 당시 사회의 성격을 살피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 상석의 규모는 축조에 동원된 인력과 상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 축조 집단의 인구 규모를 추정하고, 고인돌 피장자의 위세를 확인할 수 있다.

광령리 10호 고인돌인 경우, 그 무게가 약 15t 가량 될 것으로 환산되었다. 이 고인돌을 운반하는 과정에서 성인 남자 1인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를 100㎏으로 잡는다면, 단 1기의 고인돌을 운반하고 축조하기 위해 150명의 인력이 동원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가구당 4~5인으로 구성된 생물학적 가족 요건에 1인의 성인 남자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 고인돌을 축조할 당시 650~800여 명의 인구가 고인돌 인근에 거주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제주도 고인돌의 분포 지역을 보면, 약간씩 축조시기를 달리하더라도 이런 고인돌을 축조할 당시에 그 지역에는 약 200~300여 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고인돌의 분포와 동일시기 토기의 공반 정도에 따라 살펴보면, 탐라 전기에 한라산 북쪽에는 용담동·오라동 일대와 광령리·고내리·귀일리·곽지리·옹포리 일대에 각기 규모를 달리하는 거주 집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한라산 남서쪽에는 일과리·동일리·화순리·창천리 일대에, 남동쪽으로는 신례리·신천리·신풍리·신산리 일대에 크고 작은 마을 집단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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