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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녕리의 지리·사회 환경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T06003
한자 金寧里-地理社會環景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
집필자 심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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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녕은 해안가에 있는 마을이다. 제주시에서 일주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약 30㎞를 달려가면 김녕마을을 만나게 된다. 기온은 연평균 약 11.8C, 평균 강수량은 1,444㎜로 제주특별자치도의 평균 기온 및 강수량에 조금 못 미치고 있다. 이는 차가운 바닷바람과 강한 대륙성 고기압의 영향 때문인 듯하다.

제주도에서 보기 드물게 하천이 없어 마을에 다리가 없는 유일한 지형이다. 그러나 김녕 주변에는 동굴이 많고 지하수 매장량이 풍부하여 용천수가 마을 여러 곳에 있다. 게웃샘물, 성세기물, 청굴물 등의 용천수가 있어 용수는 주변 마을에 비해 풍부한 편이다. 특히 게웃샘물은 마을 중심에 위치하고 있어서 마을 사람들의 주요 식수 공급원이었다. 그리고 게웃샘물에서 흘러 해안가에서 샘솟는 청굴물은 마을 사람들이 해질녘에 와서 목욕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마을 주변에는 길이가 705m인 김녕사굴이 있으며 이들 천연 용암 동굴들은 좋은 관광자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김녕사굴의 발견자는 이번 조사의 주요 제보자인 김군천 노인회장이다.

동서가 나누어졌다가 2000년 하나가 되다

김녕리의 살아 있는 역사라고 자부하는 김군천 옹은 김녕리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김녕리는 원래 여러 개의 독립된 마을로 구성되었다. 여러 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진 김녕리지만 마을 간의 단합은 매우 잘 이루어졌다.

일제시대에는 제주도가 제주시를 중심으로 좌우로 행정구역이 나뉘어졌다. 김녕리는 옛 좌읍이라는 의미로 구좌읍이라는 행정단위로 나누었다. 각 지역공동체 단위들이 결속하여 저항하는 세력이 생길 것을 우려한 일제가 행정구역 개편을 빌미로 분할을 실시하였다. 김녕리 또한 예전에는 하나의 공동체였으나, 일제강점기에 동과 서로 나뉘어져서 동김녕, 서김녕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행정구역을 개편한 이후 마을간에 갈등과 반목이 시작되었다. 실제 예전에는 서김녕이 살림살이가 나았다고 한다. 서김녕에 비옥한 토지가 많았고 그로 인해 경제력이 뒷받침되었다. 게다가 서김녕에는 큰 포구가 있어서 육지와 일본을 연결하는 배들이 많이 왕래를 하여 교역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지금은 그 포구가 없어졌다. 반대로 동김녕은 토질이 척박하여 일제강점기 전후에는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하였다. 주된 수입원은 바다에서 나오는 멸치와 해녀들이 건져 올리는 소라, 톳 등이었다. 1914년 일제강점기의 행정개편 이후에 주민간의 갈등이 있었는데, 이를 통합하자는 주민 여론이 형성되어 1999년 7월 11일 주민 투표로 마을을 합치기로 했다.

세월이 흘러 결국에는 일제가 만들어 놓은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물고 서로 갈등과 반목에서 동과 서가 하나가 되는 역사적인 동·서김녕 통합이 2000년 1월 1일 이루어졌다. 2000년 1월 1일부터 동김녕리서김녕리가 통합되어 다시 '김녕리'로 바뀌었다. 그 결과 김녕리는 구좌읍에서 제일 큰 마을이 되었다. 김녕리란 호칭은 「富하고 平安한 마을」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 날 이후 리사무소(제주에서는 두음법칙을 사용하지 않고 리사무소라고 부른다.)도 하나로 합치게 되고 어촌계 역시 하나의 통합된 기구로 출범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牧地곶(목지코지) : 인재가 천수를 누리게 하기 위해 만든 석교

임기추(전 노인회장)는 조사자에게 김녕에서 꼭 언급해야 하는 것 중 하나로 목지코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옛 지관들이 김녕리의 산천과 지세를 돌아보고는 마을의 운세 중 목지곶은 청룡이고 가수곶은 백호를 표상한다고 하였다. 청룡인 목지곶은 뭍과 단절되었기 때문에 예로부터 인물은 걸출하였으나 단명하였다고들 전한다. 목지곶에 석교가 축조되기 전에는 수 명의 영재들이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요절하는 비운을 맞았다.

마을의 장래를 본다면 이런 일은 크나큰 손실이었으니 마을 사람들은 한탄할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이와 같이 불행을 당할 때마다 식자들은 전술한 풍수지리설을 상기하면서 목지곶이 절단된 곳에 석교를 축조하고 연륙하는 방안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공사가 웅대하고 거액의 공사비를 조달할 방도가 없어 결국 숙원 사업으로 남았다.

그러던 중 1937년에 이르러 평소 이 비운을 한탄만 하고 후세들에게 전수하여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던 한진석(韓震錫), 김병생(金枘生) 두 분의 주동으로 석교 세우는 일을 추진하였다. 당시 이장이던 박동진을 위시하여 각 조합장 및 유지들을 총망라한 목지곶 석교 축조공사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공사비는 서김녕리 8개 톳합에서 4년간 생산되는 톳 판매 대금을 각출하여 충당키로 했다. 재무는 한진석이, 공사감독 겸 총책임은 김예생이 맡았다.

한편 공사 기술진은 당시 서김녕리 정미소 북측 구오일시장통의 초가에서 하숙업을 하던 전남 해남 출신 인부에게 맡겼다. 그는 해남 지방에서 석축 공사 기술자 및 운반 인부를 모집하도록 청탁하고 이들을 초치하였다. 1938년 초에 착공하여 1939년 말까지 2년 동안의 공사 끝에 총 연장 135미터 높이 8미터의 석교가 준공되었다.

공사비는 공사 준공 시까지 2년간은 생산된 톳 판매대 각출금으로 공사 진척도에 따라 중간불로 지급하였다. 그러나 잔금 2년분의 금액에 대해서는 당시 동김녕리 바지모루 북쪽 해안변에 위치한 톳 가공 공장 주인 김만석과 교섭하였다. 그와 교섭한 내용은 향후 2년간 생산되는 톳을 그 공장에 납품하기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일정량의 전도금을 선도받아 공사비를 완불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마을에는 인재가 요절하는 일이 그리 흔하지 않게 되고, 장수자가 많음으로써 세인들이 장수촌으로 부르게 되었다. 수많은 향리 출신들이 국내외 각 분야에 걸쳐 요직을 맡아 봉사하고 있으며, 더욱이 재일 향민 중에는 재계적으로 그 명성이 자자한 사람들이 많다.

석교 축조 전에는 단절된 부위가 바다여서 이 곳을 왕래하는 것은 간조 시에만 가능했었으나 지금은 언제든지 통행할 수가 있고 편리하기도 해서 속칭 ‘생산교’라 부르고 있다.

더욱이 1948년 4월 3일 미증유의 4·3사건이 발생하여 1953년 사건이 종료될 때까지 약 4년간에 걸쳐 제주도 전체가 인명과 재산 피해가 막심하였으나, 김녕리에 피해가 많지 않았던 것은 석교 축조 후의 풍수지리로 인한 비보 풍수 덕으로 보인다고 임기추 씨는 생각한다.

마을 이름의 기원 : 쇠금자 모양으로 생긴 지형

김녕리는 해안에 위치한 마을이다. 마을의 이름은 지형을 본떠서 만들었다. 바다에서 바라보았을 때 입산봉과 묘산봉이 여덟 8자로 능선을 이루고, 그 아래로 신산, 새동산, 남흘이 한 획을 그어, 세로로는 남문골에서 하늘내까지 이어졌고, 왼쪽으로는 소여, 오른쪽으로는 한개코지가 점을 이어 쇠 금(金)자 형태로 하늘에서 보았을 때 평(平)자를 이룬 모양이어서 김녕(金寧)이라 칭하였다고 전한다. 총면적 19.925㎢로 넓은 면적이지만 경작지는 4.144㎢에 불과하여 협소한 편이다. 마을의 소득원은 주로 해녀가 수확하는 소라, 전복, 톳, 우뭇가사리 등 해산물과 마늘, 양파 등 밭작물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마을 현황 : 제주도에서 가장 큰 마을 중 하나

마을 리사무장의 도움을 얻어서 김녕리의 마을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김봉수 김녕리 사무장(1969년생)이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김녕리의 현재 가구 수는 1,148가구, 인구는 남자 1,767명, 여자 2,138명으로 총 3,805명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의 성씨 분포는 김(金)씨, 한(韓)씨, 이(李)씨, 임(任)씨, 강(康)씨, 고(高)씨 등의 순으로 다수를 점하고 있으며, 모두 36개 성씨가 거주하고 있다. 교육기관으로 1923년에 설치된 김녕초등학교, 1947년에 인가된 김녕중학교가 있다. 대부분의 가정에는 가전제품은 물론 전화, 농사용 트럭, 자가용 승용차 등이 있다. 주민들을 위한 복지후생시설로는 보건지소, 김녕의원이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주민의 종교 생활을 살펴보면, 마을 내 민간신앙이 강한 편이며 유교와 불교가 혼합된 형태를 띠고 있다. 사찰로 금용사, 백련사, 교회는 김녕교회, 김녕천주교회가 있다. 그리고 마을에 본향당, 궤내깃당, 일렛당 등이 있다. 이런 당에는 주로 마을 여자들이 참례한다. 그리고 김녕 해녀들이 주축이 되어 매년 3월 초여드렛날 한번씩 용왕제를 거행하고 있다. 이는 ‘동김녕잠수굿’이라고도 불린다. 김녕리의 관광 명소로는 만장굴, 김녕해수욕장, 미로공원 등이 있다.

마을회관, 교육기관, 정보센터

마을회관은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 1811에 위치하고 있으며 건물의 면적은 대지 743평, 건축물 235평으로 1층은 142평, 2층은 93평으로 1층에는 리사무소와 이동민원실, 그리고 정보센터가 있다. 정보센터에서는 마을 주민들의 정보화 교육도 실시하고, 마을 내 생산된 특산물을 전자상거래를 위한 인프라로 활용되고 매년 각 가정의 컴퓨터의 수리를 도와주는 자원봉사 활동도 하고 있다. 2층은 회의실로 마을의 각종 회의가 있을 때 주민들이 참여하여 회의를 통해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하는 장소이다. 조사를 수행하던 8월에는 묘산봉에 위치한 태왕사신기 세트장의 운영과 관련된 회의가 이루어졌고 9월 폭우로 인한 재해를 당한 경우에는 주민들의 임시 거처로 활용되기도 했다. 김녕에는 김녕초등학교김녕중학교 2개의 교육기관과 유아원이 있다.

김녕세일링클럽 : 미국인이 만든 요트장

전국에서 유래를 잘 찾아보기 힘든 일이 김녕에서 일어났다고 김군천은 설명한다. 바로 김녕세일링클럽이 2007년 5월 말 탄생한 것이다. 바다로 둘러싸인 제주도지만 요트대회에 대한 지방정부의 지원은 따로 없다. 그러나 독지가 더스틴 교수의 노력으로 김녕세일링클럽이 생겨났다.

더스틴은 김녕에 거주하는 미국인인데, 김녕미로공원을 탄생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김녕에 삶의 터전을 잡고 있다. 시원스럽게 트인 김녕 앞바다는 자연지리적 조건이 해양 스포츠에 아주 좋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김녕 앞바다에 제일 먼저 요트를 띄운 사람이 그 사람이다.

하지만 더스틴 말고는 아무도 천혜의 자원을 활용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시간만 흘렀다. 결국엔 더스틴의 후원으로 세일링클럽이 생겨났다. 전국 초·중등학교를 통틀어 김녕초등학교 이외에 세일링클럽이 있는 학교가 한 군데 더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만약에 전국 단위 요트클럽 대회에 출전한다면 김녕초등학교가 아무리 못해도 2등은 할 것이라고 농담삼아 이야기하기도 한다.

더스틴은 김녕초등학교, 김녕중학교, 관광고등학교 등의 학교를 후원한다. 방과 후 활동의 경우에 학생들이 돈을 내야 참가할 수 있는데, 그럴 때도 더스틴이 지원을 해주기도 한다. 초·중·고 학생의 요트 훈련은 여기 김녕해수욕장에서 이루어진다. 김봉수 김녕리 사무장도 요트클럽에 가입되어 있다고 한다. 리사무장은 토박이들이 이런 붐을 일으켜야 제대로 해양 스포츠가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가입한 것이다. 그러나 요트를 타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중요한 날씨가 잘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마을 단체 : 빛나는 김녕중학교 총동문회의 장학사업

김봉수 사무장은 마을의 다양한 자생 단체에 대해 소개해 주었다. 김녕은 비교적 마을 규모가 크고 역사가 오래되어 마을 단체가 다양하고 결속력도 뛰어나다고 한다. 김녕리에는 노인회, 청년회, 부녀회, 어촌계, 의용소방대, 적십자봉사회, 축산계 등과 각종 작은 친목회가 있다. 친목회 중에서 활동을 왕성하게 하는 김녕중총동문회는 장학사업을 펼치기도 하는데, 그 규모도 가장 크다. 특히 김녕리는 세 집에 한 집 꼴로 재일동포가 많은 고장이며 이 분들의 애향심은 대단하여 학교 시설 및 급식소, 경로당, 복지회관 건립 등에 많은 협조를 해왔다.

행정기관 : 일주도로 주변은 행정타운

김녕리를 관통하는 일주도로 주변으로 김녕파출소, 농업협동조합, 마을금고, 우체국 등이 자리를 잡고 있다. 수협출장소도 파견 근무 형식으로 직원을 두어 마을 살림살이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한다. 동·서김녕 통합 후 생겨난 행정기관 건물들은 새로 개통한 마을 우회 일주도로 주변에 자리잡고 있다. 김녕리사무소 내에 구좌읍에서 파견된 이동민원실, 김녕소방파출소가 자리하고 있다.

나누어져서 쇠했던 김녕, 이제 합치다

마을 주민들은 한결같이 김녕이 동·서로 나뉘면서 마을이 더 쇠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마을 어른들이 선조들로부터 전해 들은 김녕은 오래도록 한 마을로 자리를 잡아왔고,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면 동·서로 나뉘면서 마을이 쇠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김녕향우회에서 발간된 『영등물·성세기』에 기록된 김녕의 역사를 보면, 김녕은 1300여 년의 오랜 역사를 이어온 마을이다. 예로부터 김녕현이라는 현촌이 설치되었을 정도로 마을세가 커서 천하대촌이라 하였으며, 제주 동부 지역(조천, 구좌) 관내 상업과 교육의 중심지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담당하여 왔다고 한다.

이렇게 마을 규모가 크고 오랜 역사를 바탕으로 주민들 간의 깊은 유대감과 연대 의식은 대단하였다. 연대 의식이 강한 김녕리 사람들의 집단적 힘을 두려워했던 일제 당국은 골목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동김녕리서김녕리로 행정구역을 분리했다. 오랜 역사 속에서 형성된 유대감과 연대 의식이 행정구역 분리 이후 대립과 반목을 낳게 되었다. 이러한 갈등이 심화되면서 단합을 저해하고 궁극적으로는 마을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역사, 지리, 환경, 문화적 모든 조건이 분리될 수 없는 여건임에도 외세에 의하여 타의적으로 마을이 분할되었다고 생각한다.

마을 통합의 당위성을 내세우면서 분할되어 생긴 일이라고 주민들은 생각한다. 그래서 빠른 시일 안에 동·서 통합을 실현하여 오랜 역사 속에 이어져 온 깊은 유대감과 연대 의식을 회복해야 한다는 욕구가 강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 조상님들이 이룩해 놓은 천하대촌이라는 마을의 자존심과 지역 주민의 자긍심을 회복하여 마을 발전의 원동력으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취지에서 마을을 다시 하나의 김녕으로 통합했다고 한다.

김녕리 내의 학교 설립 : 남포등 켜고 야간학교 운영

2000년 1월 이전에는 행정구역으로 동김녕, 서김녕을 행정적으로 구분하였다. 김녕이 규모가 컸기 때문에 동쪽 1번지 서쪽 1번지로 구분하였지만,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집들은 모여서 살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제주시에 있는 관덕정과 같은 건물이 서김녕리사무소에 있었다고 한다. 야간 중학이라고 해서 이 건물에서 석유를 넣어서 켜는 남포등을 8개 정도 켜서 불을 밝히고 선생들이 가르쳤다. 청소를 하다가 남포등을 잘못 건드리거나 석유를 넣다가 불씨가 떨어져서 화재가 나기도 했다.

김녕의 고구마 소주 공장 : 돼지 사료로 이용된 술지게미

김녕에는 1965년 무렵까지 마을에 소주 공장이 있었다. 그 술 공장 자리에 약국(칠현약국)이 들어왔고, 현재는 아쉽게도 술 공장의 자취를 찾아 볼 수 없다. 당시에 제주시에 양조장이 있긴 하였으나, 북제주군에서는 거의 다 김녕의 소주 공장에서 배급을 받았다. 당시 그 술공장의 술 담는 독이 80~90개 정도 있었다.

제주에 술도가가 많이 생겨난 이유 중 하나는 일제시대에 제주도에 고구마를 대량으로 재배하는 방법을 권장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총독부는 고구마 소주를 이용하여 무수 알코올을 생산, 군사용으로 활용하기까지 하였다. 김녕은 제주도 동쪽의 중심 마을이었기 때문에 고구마를 특용작물로 재배했고, 당연히 소주 공장도 들어섰다. 소주를 만든 이후 고구마 술지게미는 돼지를 키우는 사료로도 이용되어, 1930년대 이후 돼지 사육이 증가하였다.

김녕의 해산물 가공 공장 : 톳 공장(동김녕), 통조림 공장, 단추 공장

김녕의 톳 공장(동김녕), 통조림 공장에서는 김녕 해녀들이 소라가 아주 많이 나오는 음력 12월~1월에 소라를 삶아서 통조림을 만들었다. 주요 판매 경로는 일본이었다. 하지만 해수 기온의 변화와 자원의 고갈로 더 이상 소라 생산이 많지 않아서 통조림 공장은 없어졌다.

그리고 제주에서는 소라 이외에도 전복과 같은 패류의 껍질을 원료로 단추를 생산하였다. 김녕에도 단추 공장이 있었다. 당시 대부분 어업, 농업이 주요 수입원이었는데, 단추 공장이 들어서면서, 비록 시설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근대적 형태의 공장이 김녕에 들어서게 되었다. 공장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부자로 등장했다.

오일장 세화장터 가기 힘드네

구좌읍, 조천읍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던 김녕에는 세화, 함덕에 오일장이 없을 때에 오일장이 있었다. 주변 마을 중 하나인 중산간 마을 송당에서는 이 장터에 숯을 내다팔고, 계란, 돼지, 농기구 등도 제주 여러 지역에서 가지고 왔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말미암아 행정기관이 세화리에 들어서고 행정 중심지로 사람들이 몰려서 다른 지역에서 김녕장을 더 이상 찾지 않아 김녕의 오일장은 자연히 쇠퇴하여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김녕 오일장이 쇠퇴하긴 하였지만, 해방 직후까지는 김녕에 오일장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자취를 감추고 없어졌다.

동성동 끝부분(일주도로 해변가)이 옛 오일시장 터이다. 현재는 오히려 김녕 사람들이 세화오일장에 장을 보러 간다. 하지만 세화오일장 역시 대형 할인마트의 영향으로 예전과 같은 분주한 분위기는 아니다. 2007년 여름, 세화장에는 상인의 숫자가 구매하러 온 사람들보다 더 많았다. 이런 재래시장의 쇠퇴는 대도시의 경우와 비슷한 이유로 교통의 발달과 특히 자기 차량을 소유하면서 생겨난 현상이다. 필요한 물건은 차를 타고 대형 할인마트가 있는 제주시로 가서 싸게 구입하려는 소비자의 판단 때문에 오일장은 쇠퇴하는 중이다.

해녀 많은 마을에서 나는 우뭇가사리와 보말

해녀들이 많은 김녕에서는 다양한 해산물이 있으나 특히 관심이 가는 주요 특산물은 우뭇가사리와 보말이었다. 우뭇가사리는 바다에서 건저올린 천초를 건조해서 만드는데 해녀들이 직접 건지고 건조하고 우뭇가사리를 만들어 판매를 한다. 보말 역시 해녀들이 수확을 해서 어촌계를 통해서 판매를 한다.

천초를 말려서 만든 한천은 해녀들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이다. 7~8월은 금어기여서 해녀들은 대부분 밭일을 하거나 천초 작업을 한다. 이것은 말려서 상당 부분 일본으로 수출도 한다. 요사이는 제주시 화북마을과 자매결연을 맺어 직거래를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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