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T05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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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形成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 |
집필자 | 심재석 |
마을의 형성 : 19세기부터 집단적인 마을로
『납읍 향토지』에 수록된 납읍 향사 기록에 따르면, 애월읍 납읍리에 사람들이 정착해서 마을을 형성한 시기는 고려 충렬왕 26년(1300)경, 지금으로부터 약 7백 년 전으로 추정된다.
조선 태종 16년(1416) 안무사 오식의 계청에 의하여 산북을 제주목으로 하고 목사를 두게 되었는데 납읍은 제주목 산하의 곽남이 되었다. 이 곽남이라는 마을명이 와음이 되어 과납으로 통용되었다.
숙종 10년(1680년)에는 향사(鄕舍)가 건립되었다. 주민의 수가 증가하여 공동의 관심 사항에 대해 의논을 하거나 공지사항을 알리는 장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숙종 연간(1801)의 납읍 규모는 약 300호에 달하는 대집단 마을이었다. 대개 당시의 농촌 마을은 농지를 따라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 주거가 분산되는 것이 상례인데, 당시 납읍리의 규모는 제주 지역에서 보기 드물 정도로 큰 마을이었다.
당시 납읍의 주민들은 농업과 축산을 병업하는 경우가 많았다. 납읍의 규모가 컸던 만큼 납읍에는 목축과 농업에 종사하는 부농들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선비들이 많은 유촌(儒村)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애월, 곽지 등 주변 마을의 좋은 땅에서 마을 주민들이 열심히 살아간다.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정책의 여파로 납읍 마을 사람들도 공출과 징병, 징용, 강제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설날은 양력으로 바뀌었고, 일본어 상용이나 서당을 폐쇄하는 문화 말살 정책의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일제 말기 때 수 개월 동안 애월국민학교가 납읍리로 옮겨와 수업을 받았으며, 바닷가 주민 일부도 납읍으로 옮겨와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에도 1948년 11월 14일 밤중에 전 부락의 완전 소개령이 내렸다. 무장대들의 이용 또는 방화를 방지하기 위하여 가옥을 완전히 파괴하라는 명령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유서 깊은 가택을 자신들의 손으로 모조리 허물고 부락 전체를 완전히 폐허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당장에 필요한 침구와 식량만을 챙긴 사람들은 인근 부락인 곽지, 애월, 고내 등으로 인연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1948년 12월 17일에는 향민이 피땀으로 건립한 국민학교 시설마저 무장대의 방화로 소진되었다.
1949년 4월 29일에 소개령이 해제되어 사람들이 복귀하고 향토 재건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장으로 선출된 유홍식을 중심으로 각 방면으로 교섭하여 향리가 재건되고 공동 입주가 이루어졌다. 이 때 납읍은 새로운 마을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납읍리가 현재와 같은 지리적 구조를 형성한 때는 1675년이다. 마을의 변두리의 집들은 납읍의 중심지로 이동해서 새롭게 정착을 했고, 이주민들도 이때부터 늘어났다.
이와 같이 현대사의 굴곡 속에서 마을은 새로운 면모를 갖추었지만, 예로부터 유교를 숭상했던 마을의 전통은 그대로 이어져 마을 안에 서당을 두고 한문을 지도하기도 했다. 인근 마을들에 비해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는데, 이 마을 출신으로 공직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 200여 명에 이르며 특히 제주에는 납읍 출신 경찰관들이 많다고 한다.
2007년 10월 현재 납읍리에는 500가구가 살고 있으며, 인구는 1,389명이고, 주민들은 주로 농업과 목축업을 하고 있다. 전체 경지 면적은 810㏊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