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T04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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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歲時風俗-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노형동 |
집필자 | 김동윤 |
1970년 전후 세뱃돈은 10원
강덕환의 집안에서는 설 명절을 계속 음력으로만 했다. 정부에서 강력하게 양력설을 권장할 때도 바꾼 적이 없다. 명절 때 어른들은 한복을 입었다. 묘제 때는 소복을 입지만 제사나 명절 때는 입지 않더라고 한다. 아이들 설빔으로는 새 옷을 입는 정도였지 한복을 입지는 않았다.
세뱃돈은 그가 초등학교 시절엔 10원 정도였고, 5원짜리 종이돈도 받았다. 중학생이 되니까 100원 정도 받았던 것 같다고 한다. 중학교 때의 버스 요금이 좌석 18원, 입석이 12원이었다. 대학에 입학한 1980년대 초에는 학생 할인해서 60원이었다. 할머니는 다른 사람들이 보통 10원의 세뱃돈을 줄 때 100원 정도 주더라고 한다. 할머니는 닭 키우며 달걀을 모았다가 오일장에 가서 팔아 용돈을 마련하곤 했으니, 그것을 아껴두었다가 세뱃돈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추석 때는 특기할 만한 풍속이 없었다. 친척들끼리 만나 차례를 지내고 제수 음식을 먹으며 담소 나누는 정도였다.
신구간에 있었던 일들
강덕환은 아버지가 신구간을 맞아 집 주변에 허물어진 돌담이나 변소를 고치는 것을 몇 번 보았다고 한다. 그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1977년에는 한림 출신의 제주농업고등학교(지금의 제주관광산업고등학교) 학생에게 방을 빌려주기도 했는데, 그 학생이 이사오고 이사가는 것도 신구간에 이루어졌다.
입춘 부적 붙이기
강덕환은 입춘과 관련하여 어려서 ‘새철 드는 날 밧듸 가민 버랭이 궨다(입춘 날 밭에 가면 벌레가 많이 생긴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입춘을 맞아 특별하게 행했던 풍속은 거의 없다. 절간에서 주는 부적 같은 것을 출입구 쪽에 붙이는 정도만 했던 것 같다고 한다. 절에서 주는 부적을 붙이는 것은 지금도 하고 있다. 거의 어머니가 가져온 부적을 붙여왔는데, 2007년에는 장모가 준 부적을 붙였다.
정월 대보름
강덕환은 정월 대보름에 행하는 특별한 세시풍속을 보았던 적도 없었으며 그 날을 특별한 의미로 여겨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다만 ‘정월 대보름 전에 연 날리는 것을 그만둬야 한다, 보름날에는 연을 띄우더라도 반드시 날려 보내야 하는 것이다’라는 얘기를 듣기는 했다고 한다.
백중날 물맞이
강덕환에게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드르구릉에서 올라간 지경에 있는 배염다리와 도두동의 오래물 등지로 물 맞으러 다니던 기억이 있다. 배염다리는 현재 미리내공원 옆의 쓰레기 매립장 자리를 말한다. 어승생 수원지가 만들어지면서 그곳에 흐르던 물이 끊기고 말았다. 물 맞으러 다닌 때가 백중날이었는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닭을 키우다가 여름에 잡아먹은 적도 있는데 그것이 딱히 백중날이나 초복, 중복, 말복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고 한다.
동지 팥죽 먹기
강덕환의 경우 동지 때는 어머니가 쑤어주는 팥죽을 먹는 정도로 보냈다. 요즘도 동지 때는 팥죽을 쑤어 먹는다. 물론 지금의 팥죽은 아내가 쑤어주는 것이다. 동짓날 팥죽 먹기에 대해 그는 액막이의 의미라고 여기고 있다.
서커스와 걸궁
강덕환은 어린 시절 공회당 터의 가설극장에서 사발돌리기 등을 구경한 적이 있다. 마을을 찾아온 그 일행은 이런저런 구경거리를 공연하고 나서 모여든 사람들에게 약을 팔곤 했다. 그에게 걸궁은 제2횡단도로 개통하는 날 본 기억이 유일하다. 그렇다면 1960년대 말의 시점에서 노형에서는 걸궁이 거의 없어졌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