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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덕환 씨의 가족과 성장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T04017
한자 -家族-成長期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노형동
집필자 김동윤

강덕환 씨가 살아온 이야기

강덕환은 40대의 중반으로 이 사회에서는 아직 젊은 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마을 이야기를 들려주기에는 너무 젊은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도 가질 만하다. 하지만 그가 살아온 내력을 보면 그야말로 노형마을의 이모저모를 일러줄 이야기꾼으로서 적임자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노형동의 자연마을 중 하나인 ‘다랑굿(월랑)’에서 태어나 현재도 계속 이곳에서 살고 있다. 초등학교는 인근에 있어서 당연히 걸어 다녔지만, 그 이후에도 집을 떠나 자취나 하숙을 한 적이 없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도 모두 집에서 버스를 타고 통학하였다. 방위(단기사병) 근무도 노형동에서 하였고, 결혼 후에도 줄곧 이곳에 거주하고 있다. 그가 노형을 떠났던 시기는 대학 졸업에 즈음하여 서울의 한 회사에 취직했던 6개월 정도에 불과하다. 특히 부모가 이웃에 살고 형제(5남)들이 모두 같은 다세대주택에 거주하고 있으니(누나도 같은 다세대에 살다가 최근에 이사를 갔다.), 그는 노형동 토박이 중의 토박이에 속한다. 그는 어린 시절인 1960년대 후반의 기억부터 급격한 변모를 보인 현재 상황에 이르기까지 마을의 여러 정보들을 놀랍도록 낱낱이 꿰고 있었다.

출생

강덕환은 1961년 음력 6월생이다. 만으로는 마흔 다섯이요, 우리 나이로는 마흔 일곱 살이다. 진주 강씨(姜) 제주 입도(入島) 17대손이니, 그의 조상이 제주에 들어온 것은 500년 정도 된 것으로 보면 된다. 한자로는 큰 덕(德), 빛날 환(煥)자를 쓴다. 세상에서 크게 빛나기를 바라는 의미를 담고 지은 이름인 것으로 그는 생각하고 있다. 그의 이름을 지은 사람은 아버지다. 그는 동생들 이름 지을 때를 기억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옥편 찾고 획수를 맞춰가며 이름을 짓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는 5남1녀 중 차남(제주에서는 ‘셋놈’이라고 한다.)인데, 남자 형제들은 ‘덕(德)’자 돌림이다. 형은 덕수(1955년생), 그 아래로는 덕희(1965년생), 덕호(1968년생), 덕하(1970년생)가 있다. 손위누이인 옥선은 1958년생이다. 막내 동생만 두 살 터울이고, 나머지는 모두 세 살 터울인 셈이다. 그의 출생과 관련하여 가족 중에 누가 태몽 같은 걸 꾸지는 않았다고 한다. 당시 누구나 그랬듯이 집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가 양자든 집안의 고모가 아기를 받았다고 한다. 출산할 때 크게 고생했다거나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밭일(검질매기 등)하기

강덕환은 콩밭, 유채밭 등에서 ‘검질매기(김매기)’를 많이 했다. 여름방학 때는 특히 많이 매었다. 그때 밭에서 검질을 매면서 잡초 이름을 많이 알았다. 제완지, 쉐터럭, 보쿨, 고냉이쿨(달개비), 쉐비름, 비름 등이 그것이다. 풀을 쿨로 발음했던 것 같다. 참으로 많은 날을 아침에 가서 점심도 밭에서 먹고 어둡도록 일하다 오곤 했다.

좀 어린 때(12~13살 이전)는 동생을 돌보는 일이 많았다. 집에서도 보고 밭에서도 보았다. 집에서 아기를 보다가 깨어나면 들춰 업고서 젖 먹이러 밭에 가기도 했다. 아이들은 조밭의 검질매기는 잘 안 시켰다. 조가 자랄 때 매우 까칠까칠하며, 고랑이 없어지기 쉽고, 조 비슷한 식물인 ‘고라지’를 솎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리밭 매기도 ‘데우리’를 잘 솎아내지 못한다고 잘 안 시켰다.

소 키우기, 소꼴 장만하기

동네에서 사람들끼리 당번을 정해 초원 지대에서 소를 먹이고 오는 것을 ‘번쉐’라고 한다. 강덕화는 부모를 대신하여 여러 번 번쉐를 나가기도 했다. 대개 20마리 정도였다. 주로 지금의 제주관광산업고 쪽으로 몰고 갔다 오곤 했다. 소가 집에 있을 때는 동네의 가까운 물가로 데리고 나가 물을 먹이고 오기도 했다. 가을에 촐왓에 가서 ‘호미(낫)’로 베어 그것을 묶은 후 싣거나 져서 날랐다. 우영팟에 두세 개 정도의 촐눌을 마련했다. 소에게 꼴을 줄 때는 작두로 썰어 주는 일도 있었다. 그때는 쌀겨를 버무렸다. 조짚도 같이 썰어주었다.

삼마 캐기, 지네 잡기, 인동꽃 따기

1970년대 전후로는 약재로 활용하기 위해서 삼마·인동꽃·지네 등을 수집해 갔다. 시골에서는 여가가 있을 때는 이런 것들을 장만하여 팔고서 용돈 등으로 쓰곤 했다. 강덕환은 누나나 동네 아이들과 같이 삼마를 캐러 다녔다. 주로 밭 갈고 난 데에서 많이 캐었다. 검질 맬 때 모아두기도 했다. 대개 쓰다 버린 깡통을 갖고 다니며 모아두었다가 팔았다. 지네는 ‘지넹이’라고 했다. 주로 봄에 많이 잡으러 다녔다. 돌을 들춰보아 지네가 있으면 재빨리 밟아 누른 다음 손으로 이빨을 빼서 ‘주멩기(주머니)’에 넣었다. 잘못해서 지네에게 물리면 손에 오줌을 싸서 소독하기도 했다. 인동꽃(금은화)도 따서 팔았다. 정존마을 곱새하르방이 받으러 다녔던 기억이 있다. 당시 아이들은 이런 것을 팔아 학용품을 산다든가 과자 등을 사먹기도 했다. 경우에 따라 어머니가 “이레 도라(여기로 주라)” 하며 가져가기도 했다. 강덕환이 사먹었던 것은 오다마, 라면땅, 건빵 같은 것이었다. 자전거에 박스를 싣고 아이스케이크 장사가 와서 사먹기도 했으나,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지들커 하기, 솔똥 줍기

‘지들커’는 땔감을 말한다. 강덕환은 1970년대 중반까지 마을 인근에 있는 소나무 밭에 가서 수시로 삭정이도 꺾어오고 솔잎도 긁어왔다. 삭정이나 솔잎을 장만하여 한 짐이 되면 등짐으로 져서 집까지 와야 했다. 장작도 마련했다. 장작은 도끼로 깨어서 쌓아놓았다가 집에서도 쓰고 장사꾼에게 팔기도 했다.

그런데 1973~4년 무렵에 아버지가 석공 일로 번 돈으로 석유풍로(당시에는 ‘곤로’라고 했음)를 샀다. 그 다음부터는 지들커 하는 일이 많이 줄어들었다. 연탄은 1980년대 접어들어 밖거리를 지으면서 난방용으로 썼다. 방 하나를 연탄아궁이로 하고 나머지는 화덕을 썼다. 가스는 새 집을 지으면서부터 쓰기 시작했다.

강덕환은 소나무 밭에 가서 ‘솔똥(솔방울)’을 줍기도 했다. 솔똥은 난방용으로 썼던 것인데, 그것을 내다 팔기도 했다. 초등학생이던 1970년대 초반에는 누나와 함께 솔똥 가마니를 져서 시내의 칠성통까지 가서 “솔똥 삽서. 솔똥 삽서.” 외치며 팔았던 기억이 있다. 당시 솔똥 한 가마니 가격이 100원 정도였다고 한다.

물 길어오기, 동생 돌보기

다랑굿마을에 가정마다 상수도가 들어온 것은 1970년대 중반이었다. 그러니 강덕환의 초등학교 시절에는 마을 공동수도에서 물을 길어다가 먹었다. 공동수도는 처음엔 1개만 있다가 나중에 4~5개로 늘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공동수도에 가서 물을 받아서 물지게에 져오는 일을 많이 했다. 소 먹일 물을 져오기도 했다. 남자 형제들은 주로 물지게로 날랐고, 어머니와 누나는 허벅에 져서 날랐다. 수돗물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는 용천수를 길어오기도 했다.

강덕환에게는 세 명의 동생이 있어서, 동생을 돌보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부모가 일을 나가면서 동생을 돌보라고 하면 다른 일은 하기 어려웠다. 동네 아이들과 함께 놀기도 어려웠고, 바다에도 못 가고, 삼동 등 열매 따먹으러 가지도 못했다.

어렸을 때 본 영화

「성웅 이순신」 등을 천막 쳐놓은 데서 보기도 하고, 학교 운동장에서 보기도 했다. 반공영화 같은 것들이 많았다. ‘초남동산’에 천막을 쳐놓고 상영하기도 했다. 일어서 있으면 긴 대나무로 지적하면서 앉으라고 하기도 했다. 「빨간 마후라」가 특히 기억난다고 한다. 영화를 보는 동안 박수도 여러 번 쳤고 일어서서 거수경례도 했다. 중국무술영화도 기억난다. 영화를 보면서 졸았던 기억도 있다. 대개 100~150명 정도의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보았다. 영화를 상영하는 사람들은 시발택시에 확성기 달고 “농사일에 바쁜 농민 여러분, 오늘 저녁 몇 시에 무슨 영화를 상영합니다.”라는 식으로 선전하며 다니곤 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본 것은 중학교 때가 처음이다. 세뱃돈 받고 걸어서 시내의 코리아극장에 가서 보았다.「스팔타카스」인가 「쿼바디스」인가 하는 영화였다. 그때 제주 시내에는 동양극장, 제일극장, 현대극장 같은 게 있었다.

입양하여 4대 독자가 된 아버지

강덕환 아버지의 이름은 강영진이다. 호적상에는 1938년생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1935년이니 현재 나이는 73세다. 아버지는 성가 집안 쪽으로 보면 3형제 중 장남이다. 아버지는 큰아들인데도 양자를 들었던 것이다. 강덕환 친가의 고모(아버지의 친누이)는 둘이다. 아버지가 양자 온 집안에는 고모가 일곱 분 정도 있었는데, 지금은 도두동에 한 분만 살아 있다.

아버지는 연동에서 태어났고 거기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오라초등학교 2학년까지 다니다가 양자를 들었다. 양자로 든 후에는 학교를 더 다니지 못했다. 13살에 4·3사건을 만났으니 더 공부할 수 있는 여건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양자 들기 전에 양자 집안의 할아버지를 무척 잘 따랐다고 한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양자로 삼았다는 말을 접한 적이 있다고 그는 전한다.

아버지는 3대 독자 집안에 양자로 입적하여 4대 독자가 되었다. 그러니 할머니 입장에선 어렵게 양자로 데려온 아들 하나를 보호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4·3사건 때는 가족들이 누운오름 배염다리 쪽으로 피신했었다. 아버지는 노형 지역 토벌하는 날에 집으로 오다가 죽을 고비를 넘겼다. 집으로 오다가 군인이 보이자 아버지는 구렁에 엎드렸다. 군인은 그런 아버지를 보자 발로 밟고 나서는 주머니에 칼이 있는 걸 보고 연락병 아니냐고 추궁하였다. 그러다가 빨리 집에 가라고 발로 차기에 아버지는 겁에 질려 집으로 뛰어갔다. 집에 도착한 후에 보니 아버지는 저도 모르게 바지에 겁똥을 쌌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노형리는 1948년 11월 19일 소개되었다. 그래서 그의 가족은 도두리 사는 고모네 집으로 내려가 살다가 1949년 4월경에 다시 노형 쪽으로 올라오게 되었다. 귀향 직후에는 정존마을의 지금 노형초등학교 자리에 집단 수용되었다가 1954년도에 다랑굿마을로 돌아와 새로이 집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열아홉 살이던 1954년에 도두에 살던 고모의 주선으로 어머니와 결혼했다. 얼굴을 맞대고 선을 봐서 한 게 아니라 주변에서 맺어주니 결혼했다고 한다. 말을 타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사진 한 장 찍어둔 게 없다.

농사보다는 석공 일을 주로 했던 아버지

아버지는 형과 누나를 낳고서 군대에 갔다. 군대 생활을 하다가 1960년에 의가사 제대를 했는데, 그 이유는 독자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제대한 이듬해에 강덕환이 태어났다. 아버지의 군대 주특기는 공병이었다. 군대에서 습득한 기술을 가지고 제대 후에 석공일을 한 것으로 그는 생각하고 있다. 할아버지가 네 개의 밭과 ‘촐왓(새밭)’ 둘 정도는 가지고 있어서 보리·조·콩·고구마·유채 같은 것을 주로 재배하며 소도 키웠으나, 아버지는 농사일보다는 주로 석공일을 많이 했다.

석공을 제주에서는 ‘돌챙이’라고 부른다. 아버지를 비롯해서 동네 사람들 몇몇이 같은 일을 하는 그룹이 있었다. 네댓 명 정도가 같이 일을 했다. 돌을 채취하여 실어다가 다듬어서 집도 짓고 과수원 담과 ‘산담(묘지를 둘러싼 돌담)’ 등을 쌓는 한편 상석 만들기 같은 일도 하였다. 천왕사를 지을 때도 아버지가 절집 짓는 일을 했다. 그리고 도로를 개설하면서 생기는 절개지에다 석벽을 쌓는 일도 했다. 간혹 큰 규모의 일을 맡을 때에는 집에 들어오지 않고 공사장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가까운 공사장에서 일할 때는 어머니가 점심을 해서 날랐다. 살던 집을 고치거나 새로 지을 때도 문짝 짜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버지가 도맡아 했을 정도다. 그는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가서 석공일을 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그가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힘 센 사람인 줄 알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성격이 꼼꼼한 편이다. 그래서 밭의 검질(김)을 맬 때는 빠르진 않았지만 아주 콜콜히 매었다. 두불검질(두 번째 하는 김매기)을 맬 때는 아버지가 작업했던 곳에는 거의 풀이 남아 있지 않아서 재차 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술은 잘 마시는 편이었다. 됫병 하나 정도까지도 마셨던 것 같다. 하지만 주사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아버지는 자녀 교육에는 그다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고 그는 회고한다.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도 별로 하지 않았다. 밖에 다녀올 때면 자식들에게 “쉐촐 줘시냐(소에게 꼴을 주었느냐)?” 물어보고는 미처 이행하지 않았을 경우엔 혼내곤 했다. 공부를 잘 했던 그가 상업고등학교로 진학한 것도 자식 공부에 그다지 열정적이지 않았던 아버지의 태도와 관련이 있다. 공부하라는 말은 잘 하지 않았지만 정은 많은 아버지였다. 산담일 하러 갔을 때는 떡반을 나눠주면 꼭 챙겨와서 자식들에게 건네주고는 했다. 아버지는 사회적으로 특별한 직책을 맡은 적은 없다. 단지 마을의 개발위원을 역임한 정도다. 4·3사건 당시 동네의 많은 젊은이가 희생되는 바람에 아버지 연배의 사람들이 주변에 별로 없다. 그래서 현재도 그의 아버지는 나이 많은 축에 든다. 그런 탓인지 노인회 일이나 마을 포제 등의 일이 있을 때 많은 역할을 담당한다. 지금은 게이트볼 동네 대표선수다.

밭일을 도맡아 하며 고생한 어머니

강덕환의 어머니는 김기순이다. 본관은 김해이며, 아버지보다 2년 연상인 1933년생으로 일흔다섯이다. 노형리와 인접한 해안리(해안마을은 지금 행정구역상 노형동에 편입되었다.)에서 태어났으며 학교에 다닌 적이 없다. 4·3사건 당시는 도두리로 소개(疏開) 내려가 살았으며, 사태가 진정된 이후에 아버지와 인연이 닿아 결혼했다.

4대 독자인 집안에 시집와 5남1녀를 낳았으니 동네 사람들은 복 많이 받은 여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자식들을 키우느라 엄청 고생을 했다. 아버지가 석공일을 많이 다녔으므로 밭일과 집안일은 거의 어머니가 도맡아 하였다. 그는 어렸을 때 ‘어머니는 점심을 안 먹는 존재’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분명히 점심밥을 챙기지 않고 밭에 나갔는데 저녁때가 되어야 오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동생을 돌보고 있노라면 저물녘에 일을 마치고 돌아오곤 했던 것이다. 밭은 도두동의 현재 오일장 근처에도 있었고, 재성마을(도두동에 속함)에도 있었다. 20~30분 정도 걸어서 가는 거리였는데, 어린 시절의 그로서는 굉장히 멀어 보이더라고 한다. 갈 때는 멀어서 오히려 좋았지만 돌아올 때는 그렇지 않았다. 짐을 지고 오는 경우가 많으니 힘들고 지루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별로 사회 활동을 하지 않았다. 생활개선협의회에서 식생활 개선 사업 같은 것을 한 적이 있는 정도다. 부녀회 활동도 했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서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학교에는 다닌 적이 없다. 어머니는 친정에서 큰딸이다. 남자형제 둘, 여자형제 둘이 있다.

의좋은 형제들

강덕환의 형제간은 5남1녀로 많은 편이었다. 그런데 이들 6남매는 매우 의좋은 사이인 것으로 동네에서도 유명하다. 형제들은 어려서부터 모두 스스로 제 일을 하곤 했다. 밥도 알아서 챙겨서 먹고 빨래도 스스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버지가 “어멍 혼자서 얼마나 헐 수 이시크냐(엄마 혼자서 얼마나 할 수 있겠느냐)?”면서 웬만한 일은 알아서 스스로 처리하는 습관을 갖도록 가르쳤다. 형제들이 많으니 같이 움직이면 여럿이 한꺼번에 몰려다니는 형국이 되었다. 밭일을 할 때도 한꺼번에 가서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면 이웃 사람들이 밭에 가득 찬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퍽 부러워하곤 했다. 가훈 같은 것은 특별히 없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형제간에 다투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는 것을 특히 강조했다. 그런 부모의 말을 아직까지 누구도 크게 거스른 적이 없다.

형은 제주전문대학(현재의 제주산업정보대학) 세무과를 졸업하여 새마을금고에서 오랫동안 일했다. 새마을금고가 법인으로 정비되는 초창기부터 근무하여 노형새마을금고 전무까지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1997년 IMF 구제금융 사태가 전국을 휩쓸었을 때 대출금 상환이 잘 안 되자 모든 것을 책임지고 사직하였다. 지금은 통장으로 일하고 있다. 통장 외에도 방범 활동, 노인회 총무 등 마을의 여러 일을 맡아서 하고 있다.

누나는 공부를 잘 했는데, 중학교까지만 나왔다. 부모가 중학교를 안 보내준다고 했을 때에는 물에 빠져 죽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었다. 중학교 졸업 후에는 장갑 짜는 공장에 다니기도 했다. 1974년경부터는 4H 활동을 많이 하였다. 4H에서는 주로 야학 활동, 공동 재배 등을 했다. 1980년에 결혼하였다. 결혼 초에는 이도아파트에서 살다가, 1995년 아버지가 신축한 빌라의 한 세대를 받게 되자 이사 와서 살았다. 할머니의 솜씨를 이어받았는지 한복집을 하고 있다. 전통공예대전에서 배냇저고리로 입상한 적도 있다. 빌라 지하에서 한복집을 하다가 2006년 12월 시외버스터미널 쪽으로 이사를 가면서 가게도 옮겼다.

넷째 덕희와 막내 덕하는 개인택시 기사다. 매형도 개인택시 기사이니 가족 중에 셋이 개인택시를 몰고 있는 셈이다. 다섯째 덕호는 새마을금고 전산망 관리를 맡던 갑성전자에 근무하다가 몇 년 전에 신제주새마을금고로 직장을 옮겼다. 형제들은 모두 결혼을 했다.

아들만 삼형제를 두어

강덕환은 결혼 다음해인 1993년에 큰아들 도현을 낳았다. 둘째 길현은 1997년도에, 막내 승현은 2002년도에 낳았다. 딸은 없고 아들만 3형제를 두었다. 아이들 사이에 나이 터울이 있는 편이지만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는 별로 상관하지 않았지만 아내는 막내인 경우 딸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아내는 막내가 아들이라고 해서 크게 실망하는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할머니가 데려온 아들

강덕환의 ‘성할머니(아버지의 친어머니)’가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 할머니에게는 좀 사연이 있다. 그 할머니는 개가하면서 들어온 할머니였으며, 데려온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 아들은 열아홉 살에 4·3사건을 만나 인천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강덕환은 4·3사건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도 그런 사연을 전혀 몰랐었다. 연동 지역을 조사하다 보니 사람들이 그의 집안이라고 일러주기에 할머니를 찾아가 물어보니 정말로 그렇다고 확인해 주더라고 한다. 어릴 때 기억으로 제사가 끝나면 할머니가 혼자 채롱에 음식을 가져다가 부엌에 올리곤 했는데 그게 그 아들 몫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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