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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동의 지명 유래와 전설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T04004
한자 老衡洞-地名由來-傳說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노형동
집필자 김동윤

광평마을

광평이란 ‘너븐드르(넙은드르)’ 즉, ‘넓은 들’을 의미하는 말인데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광평(廣坪)’이라 표기하게 되었다. 마을의 설촌은 현치적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지형상 광평의 중심지인 뒷르 집터에 집을 지어 살았으며, 그 후 집터를 옮겨 동쪽으로는 희나미르, 굴왓, 북쪽으로는 양씨터, 안씨터, 변개터, 서쪽으로는 고승이, 새가름, 남쪽으로는 유치동산, 웃무근터, 알무근터, 진서복터, 못밭터 등에 살면서 광평마을을 건설했다.

원노형마을

이미 설촌 유래에서 밝혔듯이 원노형은 현재 노형 로터리 동남쪽에 위치하여, 천백도로를 따라 제주일고에서 동쪽으로 연동과 경계선을 이루는 마을로 노형동에 최초로 사람이 살았던 곳으로 전해지며, 본디 노형마을인 것을 ‘원’자를 붙여 ‘원노형’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는 원노형이란 명칭은 이 곳이 노형동 설촌시거지(設村始居地)요 발상지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구전에 따르면 약 600여 년 전 현재 마을의 400m 남쪽인 ‘더렁굴’이란 곳에 이씨가 사냥과 목축을 하면서 거주하다가 원노형으로 옮겨 설촌한 것으로 전해진다.

월랑마을

흔히 다랑굿이라 말하는데 다랑곶[多朗]이라 보는 견해도 있다. 마을 중앙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앞곶[저지대(低地帶)로 월랑 남쪽과 정존마을에서 도두쪽으로 흐르는 물길로서 땅이 비옥하고 넓어서 농사도 잘 되고 생산물이 견실한 곳으로 유명함]이 있는데, 앞곶 동쪽은 동반월(東半月), 서쪽은 서반월(西半月)이라 했다. 양 반월이 모이면 만월(滿月)이 되고 만월시에는 달이 밝아 온 세상을 밝힐 수 있다 하여 월랑이라 부르게 되었다. 고지도에는 월랑화촌(月朗花村)이라 표기된 것이 있다. 이는 이두식 표기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이를 이두식으로 읽으면 ‘달월의 달(月)’, ‘달 밝을 랑(朗)’ ‘꽃화의 꽃(花)’이 되는데 그 변천 과정에서 ‘랑곶〉랑곶〉다랑굿’으로 바뀐 것이다.

정존마을

이 마을에는 정종(正宗)이라는 힘센 장사가 나타나서 전 마을을 거느리고 다스렸는데 이 사람의 이름을 따라 정종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종(宗)’자는 임금의 묘호와 같다고 하여 ‘존(尊)’으로 개칭되었는데, 지금도 작전 지도 등 일부의 문서에는 ‘정종(正宗)’으로 표기되어 있다.

월산마을

월산은 해방 전에 ‘름·새빌이[일명 누릉나미]·뱃밭·새동네[일명 꿩이술]·물욱이[水玉]’ 다섯 개 자연부락을 합하여 월산(月山)이라 불렀다. 름은 (馬)의 음(자갈의 쇠붙이)과 같다 하여 붙여졌고, 새빌이는 샛별(晨星, 金星) 동산이었는데 달체의 월(月)과 동산의 산 자를 따서 월산(月山)이라 명명하였다. 누릉나미는 옛날에 새빌이 거리 가운데 커다란 누룩나무(자음동화의 비음화 현상으로 누룽나무)가 있었다고 하며 누룩나무를 상징하여 누릉나미라고 불렀다. 벹밭은 지형이 남쪽에 위치하여 햇볕이 잘 비친다 하여 벹밭(日田)이라 불렀으며 문헌상에도 일전(日田)이라는 기록이 있다. 새동네는 동네가 새로 형성되었다는 뜻이며, 꿩이슬은 아침 이슬이 많은 숲이 있어 꿩이 서식하였다는 뜻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물욱이는 땅이 습하여 물이 잘 고이고, 물이 구슬처럼 맑아 물욱이(水玉)이라 하였다.

해안마을

해안마을은 해발 280m 고지에 위치해 있으며 서쪽으로는무수천이 흐르며 광령리와의 경계를 이루고 동남쪽으로는 해안축산마을과 인접한다. 이 곳에 약 600년 전에 ‘주루레[묵은가름]’에 진주 이씨가 처음 이주해 와 살았다고 하며, 마을의 형성은 400여 년 전 ‘예음물’과 ‘이승물’에 이주한 김해 김씨와 송씨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전한다. 해안(海安)이란 지명은 ‘해안(蟹眼, 게의 눈)’에서 변경된 것으로 ‘바다가 잘 보이고 정상이 평평할 뿐만 아니라 바다처럼 늘 마을이 평온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넙은드르 마을의 설촌 유래

현용필의 9대조는 넙은드르 설촌의 시조인 현치적이다. 현용필은 제주도 입도로는 19대손이다. 고전적과 연관을 맺은 현치적이 처음으로 노형동에 자리잡아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오도롱(이호)에서 살던 현치적은 사냥을 잘 하는 포수였다. 새를 두 마리를 잡으면 본인은 한 마리만 갖고, 세 마리를 잡아도 한 마리만 갖고 고전적에게 내주곤 하였다. 그런 일이 몇 년 동안 반복되자 고전적이 그 마음을 기특히 여겼다. 그래서 어렵게 사는 현치적에게 좋은 집터를 내주겠다고 하여 노형동으로 옮겨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치적과 관련된 넙은드르 설촌 유래는 『노형동지』 자세히 수록되어 있는데,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광평(廣坪)은 350여 년 전 현치적(玄致績)[본관은 延州, 인조 18~영조 4, 1640~1728]이 설촌하여 사냥과 목축을 생업으로 하였고 뒤 이어 양씨, 이씨, 김씨가 입주하여 형성된 마을로서 들이 넓다 하여 너븐드르(넓은드르)라 하는데 그 뜻을 따서 광평(廣坪)이라 부르고 있다. 설촌 신화로 현치적과 고전적[본명 高弘進, 선조 35~현종 13, 1602~1681, 1665년 65세에 典籍이 되었다고 한다]의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다.

광평마을의 설촌은 현치적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곳은 그 때만 해도 나무와 억새로 뒤덮인 황무지였다. 그는 처음으로 이 황무지에 들어와 억새밭을 갈아 일구어 농사를 짓고 사냥을 하며 개척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들어와 개척하는 살림이라 그의 생활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지만 마음씨는 바르고 고왔다. 이 때, 아래쪽 동네인 오도롱(지금의 이호 이동)에는 풍수지리로 유명한 고전적이 살고 있었다. 현치적은 진밭 쪽에 살고 있었는데 고전적은 종종 진밭 부근을 통해 다니곤 했다. 그래서 둘이는 서로 친분이 매우 두텁게 되었다. 현치적은 고전적을 은근히 존경했다. 사냥을 잘 했던 그는 꿩을 두 마리 잡으면 한 마리를 고전적에게 갖다 드리는 고운 마음을 지녔다. 그런데 마음씨 착한 그가 너무 가난하게 살고 있었으므로 고전적은 이를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루는 고전적이 그가 사는 곳으로 와 소독동산에 올라 앉아서,

“현서방 이리 나와 봐.” 하고 불렀다.

“현서방, 그렇게 가난하게 살지 말고 내가 터를 하나 골라줄 테니, 저 집터에 가서 살면 당대에 밥이나 먹을 테니 저기 가서 집을 지어 살아봐.”

그러면서 지금의 뒷도르를 가리키고는 자리를 잡아주며 그 곳에 집을 지어 살라고 권했다. 그 동안 현치적이 그에게 베풀었던 정성에 보답하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진밭에서 여귀왓 쪽으로 옮겨 가 살게 되었다. 고전적이 지정해 준 곳에 와서 움막을 짓고, 바로 서북쪽에 붙은 오로콤밭 부근을 개간하면서 농사를 열심히 지었다. 고전적이 지정해 준 터 덕분인지 해마다 소들이 새끼를 잘 낳아 소 부자로 소문이 날 만큼 잘 살게 되었다. 또한 그는 손재주도 좋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짚신을 잘 삼았다. 소를 들에 놓아먹이는 것이 당시의 주된 일과였는데, 전날 짚을 한 짐 준비해 두었다가 이튿날은 지팡이를 짚고는 그 짚을 짊어지고 소를 몰아 들판으로 나가곤 했다. 집으로 돌아올 때면 가지고 갔던 지팡이에 전부 짚신을 꿰어 둘러매어 돌아왔다. 이런 일이 거의 매일같이 계속되니 창고에는 짚신이 가득찼다. 이렇게 만든 짚신들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 마을 주위에는 큰 길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이용하였는데 사람들이 이 길을 다니다가 짚신 떨어진 사람을 보면,

“너븐드르 현 서방 네 집에 가서 짚신 한 켤레 신엉 갑서.” 하는 말이 인사처럼 되었다. 그는 그들에게 인심을 잘 베푸는 마음 착한 어른이었다.

그가 부자로 살게 된 계기는 당에 대한 정성이 지극한 데 있다고도 전해진다.

어느 날 지금의 당밭 부근에서 소를 먹이면서 높직한 잣벽 위에 앉아 신을 삼고 있었는데 어떤 여인이 힘없이 다가와서는, “밥 좀 줍서.” 하며 애걸하였다.

인정이 많은 그는 “여기 조금만 앉아 계십시오. 얼른 집에 가서 곧 밥을 갖다 드리리다.”하고는 얼른 집으로 달려가 밥을 가지고 왔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앉아 기다리고 있어야 할 여인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렇게 배가 고파하며 기력이 없던 여인이 가버릴 리가 없는데……·’

곰곰히 생각할수록 그 여인은 범상한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여인은 신령임에 틀림없어!’

깊은 생각 끝에 여인이 앉았던 자리에 정성을 다하여 음식을 올렸다. 그 후부터 그는 해마다 정월이 되면 그 자리에다 제물을 차리고 가서 정성을 드렸다. 그러자 해마다 농사도 잘 되고 살림은 넉넉해 갔다. 이것을 본 동네 사람들이 차차 본 받아 그와 함께 그 곳에 가서 정성을 드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곳이 오늘날 광평마을의 본향당이 된 것이다.

어느 해 흉년이 들자 현치적은 모아 둔 곡식과 재물을 내놓아 굶주리고 있는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3일 동안의 양식을 베풀었다. 이 소식은 곧 조정에까지 전해져 그에게는 선공감참봉(繕工監參奉), 큰아들에게는 종4품 첨정(僉正), 둘째아들에게는 찰방(察訪) 벼슬을 내렸다. 그 후 노후에는 다시 그에게 조정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직을 하사하였다.

절동산 바위전설

구전에 의하면 옛날 노형에는 힘이 센 장사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 중에 관아에서 이방을 지낸 홍 이방이 있었는데, 하루는 밤이 깊어 관아에서 퇴청하여 말을 타고 노형으로 오는데 지금의 삼무공원 북측에 이르렀을 때, 미인이 나타나서 말에 같이 태워주기를 간청했다.

지금처럼 자가용차라면 모르겠으나 말을 타고 가는데 같이 태워달라고 하니 이상히 여긴 홍 이방은 장사이고 관아에 근무하니 두려울 것이 없고 해서 말 위에 여인을 태운 다음 한쪽 말고삐를 풀어 그 여인과 자기 몸을 같이 동여매었다. 그러자 여인이 왜 묶느냐고 물으니 말이 달리면 떨어질까 봐 묶는다고 하며 노형 집에까지 왔다. 아마 홍 이방의 집이 지금의 우편집중국 바로 북측에 있었던 것 같다. 집 앞에 와서 그 여인을 말에서 내리니 그 집에 개가 두 마리가 있었는데 개가 달려들어 그 여인을 물려고 하니 여인은 갑자기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로 변했다고 전해오며, 같이 타고 오기는 왔지만 워낙 직성이 강하고 힘이 장사인지라 여우도 홍이방을 흔들지 못했다고 한다.

이렇게 노형에는 힘이 센 장사들이 있었는데 하루는 어느 장사 한 사람이 동쪽 조천 근방의 마을을 지나갈 기회가 있어 가다 보니 마을 청년들이 뜸돌을 들여서 힘자랑을 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과객이라 잠시 쉬면서 구경을 하노라니 뜸돌을 들어보라고 권유한다. 그 마을 청년들이 그걸 돌이라고 힘을 쓰고 있지만 과객이 보기에는 들고 자시고 할 것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구경만 하는데 청년들이 돌을 한 번 들어보라고 재차 권유하니 그저 지나갈 수 없어서 그러면 이 뜸돌을 들면 나에게 무엇을 주겠느냐고 물으니 뜸돌을 가져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 과객은 뜸돌을 들어서 메고 가던 밀 망탱이에 넣고 가버렸다. 뜸돌을 잃은 마을 청년들은 어이가 없어서 뜸돌을 들고 간 장사가 어디 사는 누구인가를 알아보니 노형 사람이라는데 노형에는 장사가 많다고 하여 그 원인을 알아본 즉, 노형 절동산에 큰 바위가 있어서 그 바위의 정기로 힘이 센 장사가 많다고 하니 절동산의 바위를 언덕 밑으로 굴려버릴 궁리를 하게 된다. 사촌이 밭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데 힘이 센 것도 배 아플 일인가 보다. 절동산 바위를 굴려 버린다는 소문을 들은 노형 젊은이들이 가만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노형 청년들은 밤마다 절동산 바위를 지켰다고 한다.

하루는 비가 세차게 부는 날이어서 오늘이야 바위 굴리러 오지 않겠지 하고 다들 집에 가버렸는데 그 새에 동쪽 마을 청년들이 비바람이 치는데 절동산 바위를 언덕 밑으로 밀어버리니 이게 웬 일인가. 바위가 있던 그 자리에서 하얀 연기가 솟아 오르며 비둘기 한 쌍이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그 다음부터는 노형에 장사가 나오지 않았다는 전설이 있다. 절동산 바위는 원노형 지금의 국민 연립주택 서쪽 노형 938번지 블록 동남쪽 부근에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 그 큰 바위를 굴려버림으로 육체의 힘은 비둘기와 함께 날아갔을지 몰라도 정신적인 힘은 남아 있었음인지 현대에 이르러 법조인을 14명이나 배출했으니 땅속의 정기는 굴리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 큰 바위가 있던 절동산 빌레는 강도가 강해서 하수구를 파기 위하여 도랑을 파는데 포크레인이 먹히지 않았다고 할 정도이다. 그러고 보니 도시계획으로 절동산은 없어졌고 눈에 보이는 바위는 굴러갔지만 절동산 지맥이 땅속 깊이 눈에 보이지 않은 곳으로 숨었으니 이제 눈에 보이는 힘이 센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지혜가 높은가 보다. 그래서 노형이 좋다는 구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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