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T03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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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日生儀禮-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 |
집필자 | 김미진 |
혼인-어른들끼리 한 약혼
고시열은 14살에 약혼해서 1948년 음력 12월 27일 16살에 결혼을 했다. 시집도 금릉에 동네에서 결혼했다. 남편 이름은 이두행이고 두 살 위였다. 시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시어머니 살아계실 때 시어머니가 동네에서 오고 가며 보고는 고시열을 착하고 예쁘다고 며느리 삼겠다고 했다. 어른들끼리 와서 술 한 잔 하면서 사돈하자고, 결혼 시키자고 얘기 한 것이 약혼이었다. 결혼 전 데이트는커녕 얼굴도 못 봤다. 남편이 한림초등학교 다닐 때 길에서라도 보이면 숨어버리곤 하였다. 어른들끼리 약혼을 결정하여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을 한다는 것은 그때 당시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고 한다.
금릉이 떠들썩한 결혼식
약혼 후 시어머니도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어 예정에 없던 결혼을 급하게 하게 되었다. 결혼 당시 시부모님은 돌아가시고 시할아버지만 살아계셨었다. 시어머니 오빠, 그러니까 남편의 외삼촌이 금릉에서 마을 리장을 하였는데 지금 국회의원만큼 권세가 좋았다. 초등학교 풍금 갖다놓고 남편의 집 마당에서 만국기 달아놓고 화동이 꽃도 뿌리면서 동네가 떠들썩하게 결혼식을 하였다. 남편은 키가 작다고 창피하다면서 결혼사진을 안 찍었다. 손자들에게도 결혼사진을 보여주고 싶은데 찍은 것이 없다고 아쉬워했다. 결혼할 때 하얀 한복 입고 면사포를 썼다. 언니, 오빠들이 일본에 있었으므로 일본산 천으로 만든 하얀 한복에 면사포는 한림의 미용실에서 빌려서 썼다.
결혼 음식은 쌀이 귀한 때라서 쌀에 보리, 팥을 섞은 밥을 손님에게 대접하였고 신랑상이나 신부상에는 쌀밥을 하였다. 반찬은 돼지고기, 감자튀김, 김치, 계란 삶은 것이었다. 친척이 많은 집은 돼지 두 마리도 잡고, 보통은 돼지 한 마리를 잡아서 고기도 먹고 삶은 물로 국도 끓이고 했다. 혼수품으로 경대, 이불 2채, 이불 상(이불을 개어놓는 상으로 서랍이 없고 네발만 달린 상모양의 이불장), 세수대야, 요강 등을 준비하여 시집을 갔다. 남편에게서 결혼반지 같은 것은 받은 적이 없고 명주옷 한 벌 받은 게 고작이었다.
금슬 좋은 부부
결혼하고 상대에 대한 호칭은 ‘여보’, ‘당신’ 혹은 이름도 불렀다. 집안일을 모두 마치고 할아버지가 밖에 나가시면 신랑, 신부 둘이 가위바위보해서 진 사람 업어주기를 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동네사람들이 ‘두행이네왕 보라, 두각시가 업을락 햄저(두행이네 와서 보라. 부부가 업어주기 한다)’하면서 소문이 나기도 했다. 고시열은 남편이 자신을 아내로 생각하기보다는 어머니나 부모, 형제처럼 의지하면서 살았다고 했다. 부모가 모두 돌아가시고 형제도 없었고 열 여섯에 고시열과 혼인해서 부모나 형제처럼 의지하면서 살았기 때문이다.
남편과 별거 생활
결혼하고 3년 후 남편은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공부를 못했다고 공부를 하겠다고 했다. 금릉에 할아버지만 계셔서 떠나지 못했는데 결혼을 하여 할아버지 밥해줄 사람을 데려왔으니 자신은 공부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남편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금릉에 있던 밭을 하나 팔고 제주시로 가버렸다. 결혼한 지 3년 만에 별거를 하게 되었으나 그때는 나이도 어리고 낮에는 물질을 하였고 근처에 친정집도 있었으므로 외롭지는 않았다고 한다. 1950년 남편은 오현중학교에 입학하여 자취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입학한 해 6월에는 6·25가 터져 군사를 모집하자 학생이었던 남편은 군대에 가야만 했다. 당시는 전쟁 중이었고 군입대시 군복무기간 단축이 결정되는 것도 아니라서 군 입대 후 독자는 의가사 제대를 신청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남편은 독자여서 3년을 다 채우지 않고 의가사 제대를 하였다.
자상한 남편
남편도 자상하여 삼화양조장을 다닐 때 월급도 그대로 갖다 주고, 도내 출장의 경우는 이부자리가 더럽다고 늦더라도 집에 와서 자고가곤 했다. 고시열이 해녀일하는 것이 힘들다고, 하지 말라고 태왁을 몇 개나 깨뜨렸다고 할 정도로 자신을 아껴 주었다고 했다. 남편이 죽고 땅을 파서 묻었지만 마음으로는 다시 찾아오지 않을까 기대하며 살았다고 한다. 남편에게 매 맞거나 욕도 한번 안 듣고 살았고, 아이가 없을 때도 다른 여자와 결혼 하라고 했는데도 자신을 아껴주고 아이를 기다려 주었다면서 이 정도면 자상한 남편 아니냐고 자랑을 했다.
늦게 본 첫 딸
고시열은 16살에 결혼하여 10년이 넘도록 아이가 없자 남편이 독자인데 자손이 없으면 안된다고 친정어머니가 첩을 얻도록 허락해 주라고 하였다. 한 때는 남편은 한사코 싫다고 끝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고 한다. 육지로 도망도 가고 했는데 남편은 자신을 데리러 와서 열여섯 살부터 결혼해서 이제껏 살았는데 당신 울리면 안 된다고 한사코 첩도 얻지 않고 아기가 생길 때 까지 기다리자고 했다. 아이가 없다가 뒤늦게 29세에 부산에서 1961년 첫 딸(47세)을 낳았다. 제주도로 내려온 후 아들(1968년)을 낳아 현재 40세이다. 애기를 낳을 때 많이 힘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왜 안 힘들었겠냐면서 지금은 30세에 아이를 낳는 것이 보통 있는 일이지만 그때만 해도 노산에 속했다. 아이를 낳고 나자 이제야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첫 딸을 낳을 때는 부산에서 낳았는데 산파가 와서 애기 낳는 것도 도와주고 그 후 3일 동안 아이도 돌봐주었었다.
아들 출산
아들을 낳을 때는 관덕정 옆에 있는 병원(이름은 잘 모르겠다고 함)에서 낳았는데 아이를 낳고 나서 아들이라고 해서 너무 기분이 좋아 아픈 것도 잊어버렸노라고 했다. 요즘은 한 달에 한 번 병원에 가서 진찰도 받고 하지만 옛날에는 낳을 때가 다되어 배가 아파야 병원에 가곤했다. 아이를 가지고도 물질을 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고시열은 남편이 한사코 반대를 하여 임신했을 때는 물질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자식 키우기
북초등학교가 위치한 중앙로 일대는 과거에는 번화가에 속했지만 지금은 오래된 상가만이 남아있어서 학생 수가 없어서 폐교 위기라고 한다. 그러나 당시는 북초등학교가 유명하였는데 칠성통에서 살 때라 아이들은 모두 북초등학교를 다녔다. 남편은 삼화양조장에 다니고 고시열은 칠성로에서 여러 가지 잡화를 파는 구멍가게도 하고 틈이 나면 물질도 하면서 살았다. 사는 것이 바빠서 아이들이 소풍을 갈 때 한 번도 따라가 본적이 없다고 했다. 도시락 반찬은 계란 삶은 것이나 멸치 볶음을 해주면 아주 좋은 반찬이었다. 그 때도 김밥은 있었지만 한 번도 싸주지 못했다고 했다.
아이들 운동회 때는 학교에 갔었는데 아들은 달리기를 아주 잘해서 늘 1등을 도맡아 했다. 아들은 개근상도 타고 했었는데 딸은 몸이 안 좋아 자주 결석을 하곤 했다. 그러나 둘 다 크게 아프거나 속을 태운 적은 없었다고 회상했다. 아들은 2대 독자로 현재 집에 같이 살고, 딸은 결혼해서 남해에 산다. 큰 딸 밑에 딸이 하나 더 있었는데 어려서 몸이 아파 죽어버렸다. 아들(1968년생 40세)에게는 손녀 둘이 있는데 13세, 12세로 동초등학교 6학년, 5학년에 다니고 있다. 딸에 손자는 딸(27세) 하나, 아들(14살) 하나 있다. 남해에 사는 딸이 옷도 사서 보내고, 돈도 보내주어서 약도 사서 먹고 한다. 딸 가진 부모가 유세를 한다고 아무래도 어머니 생각하는 사람은 딸 밖에 없는 듯하다.
사돈이 죽으면 팥죽을
친정아버지는 그녀가 스무 살에 돌아가시고 친정어머니는 84살까지 살아서 15년 전에 돌아가셨다. 친정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오빠가 있으니까 오빠가 알아서 하고 같이 부담할 것만 부담하였다. 제주에서 친정부모가 돌아가시면 사돈집 즉, 시댁에서 팥죽 쑤어 가지고 오는 풍습이 있다. 사람이 죽으면 가매장하였다가 입관하는 날 사돈들이 팥죽을 쑤어오는데 다른 음식을 만들지 않고 팥죽을 먹었다. 지금도 사돈이 죽으면 팥죽을 쑤어서 가는 곳도 있기는 하나 대부분 식당이나 장례식장에서 하기 때문에 생략하는 경우도 많다. 경우에 따라서는 식당에서 팥죽을 쑤어주기도 한다. 이때의 팥죽은 죽은 자가 극락왕생할 수 있도록 잡귀를 쫓는 의미이며 망자가 병으로 사망한 경우 역귀를 막는 효험이 있다고 하며 산 자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효험의 음식이다. 팥죽을 쑤어 가는 것이 번거로워서 요즘에는 라면과 식혜를 까만 비닐봉지에 싸서 나눠주기도 한다.
부모가 돌아가실 때는 어느 상제 뒤로 팥죽 몇 허벅씩 왔는지 확인하며 이야기 거리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고시열은 시부모가 안 계셔서 시댁의 숙모, 백모가 팥죽을 쑤어왔는데 12허벅 정도 가지고 와서 다른 상제들보다 많이 가져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고 했다. 팥죽은 입관하는 날만 먹으며 상례 음식은 돼지고기 석 점, 김치, 밥, 술 등이 있었는데 밤늦게 까지 상을 지키는 상제들의 간식으로 남은 팥죽을 데워서 먹기도 했다.
시할아버지 사망
시할아버지 1951년에 돌아가셨는데 남편은 군에 있을 때이고 전쟁 중이라서 오지 못했다. 상제 한 명당 술 두 춘이나 세 춘이(1춘이: 12되), 돼지 한 마리를 준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주로 3년 상 했고 물론 매 식사 때 마다 상식을 올리는 것은 기본이었고 소상, 대상에 먹을 술을 미리 담는 일과 돼지를 기르는 것이 큰일이었다.
땅을 파서 항아리를 몇 개 묻어서 술을 담갔는데 상제 한사람에 두 춘이(12되)나 세 춘이 부담했었다. 친정어머니가 돼지 기르는 법을 가르쳐 주어서 시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년 후에 하는 소상과 2년 후에 하는 대상 때 쓸 돼지를 집의 통시에서 길렀다. 그때는 대부분의 집에서 돼지를 길렀다. 우선 화장실 처리가 해결되고, 음식물 찌꺼기가 처리되며, 집안에 큰 일이 생기면 돼지고기로 쓸 수 있고, 밭에 줄 거름을 만들어준다. 돼지가 사는 통시에 보리 짚을 깔아주고 거름을 만들어 보리씨를 거름에 섞어서 밭에 파종을 했었다고 한다. 돼지의 주 먹이는 사람들이 먹다 남은 음식도 주었지만 술 주시(찌꺼지)도 많이 주었다. 감자 삶아 놓고, 좁쌀 갈아서 놓고 누룩을 섞어서 술을 만들었다. 걸리면 벌금이 나오니 숨어서 고소리(술 정제 기구)로 닦으면서(빼면서) 담갔다. 소상을 한번 하려면 술 닦으랴(담그랴), 돼지 기르랴 힘들었다. 조문 오는 손님도 많아서 금릉에서 상이 나면 협재, 한림, 월령 등 근처 마을에서 친척들은 다 모였다. 그래서 돼지고기도 많이 먹으면 부족하니 딱 석 점씩만 주었다.
남편 사망
남편이 죽었을 때는 돈만 있으면 되었으니 모두 불러서 했다. 병풍 치고 상식하고, 과일도 사다가 올렸다가 내려서 아들도 먹이고 초하루와 보름에 삭망을 하여 상을 차려놓고 제를 지내기도 하고 했다. 사촌 시동생이 얼마 전에 죽어서 가보았더니 산천단 위에 있는 양지공원에 가서 그냥 화장시켜 납골당에 놓으니 상식이나 삭망도 안하고 일요일 아이들 모일 수 있는 날 가서 인사를 한다고 한다. 요즘 삶은 살기가 편해서 보통사람들 사는 것도 나라사또 삶이라고 했다. 고시열은 칠순잔치나 환갑잔치를 안했다. 아이들은 하자고 하였으나 칠순하고 환갑하면 오래 못산다고 안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차례·기제사
고시열네 집 제사는 일 년에 두 번이다. 시어머니 제사와 시아버지 제사를 합제 하여 음력 1월 27일, 남편 제사 5월 19일이다. 시아버지와 남편 아들이 독자라서 제사가 많을 듯 하지만 시아버지가 장손이 아니라서 제사가 많은 편은 아니다. 부모제사만 모시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