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T02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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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 |
집필자 | 현혜경 |
4·3과 감시
신옥년이 해방 후 귀국한 지 얼마 안돼서 4·3을 맞았다. 1947년 3·1절 행사로 시작된 4·3을 그는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사람이 사람을 직접 죽이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2차 대전 때에 미국이 일본을 습격할 때도 폭탄으로 습격했기 때문에 직접 사람을 죽이는 모습보다는 판자집들이 불타는 영상이 오히려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4·3이 일어나서 사람이 사람을 직접 죽이는 모습을 보고는 꽤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농작물을 거두러 밭엘 가도 토벌대가 ‘산에 다녀온다며, 폭도들과 무슨 연락을 하고 오느냐’며 억지를 쓰고, 잡아다 밭 개울 같은 데서 총살시키고 했다고 한다. 다행히 신옥년의 집은 4·3으로 죽은 사람은 없었지만, 남편이 래물 밭에 병작(소작료)을 받으러 가려고 할 때에도 폭도들과 연락을 하러 다니냐고 해서 병작을 모두 포기했었다고 한다. 한번은 남편의 사촌 동생이 소작을 마차에 실어놓고 남편을 불렀는데, 남편이 가자마자 무장대가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에 사촌 동생 집의 ‘쳇방(부엌과 이어지는 작은 방)’에 숨어있다 소작도 포기하고 한달음에 달려왔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때 남편은 한천다리에 이르러 삐라가 뿌려져 있는 것을 보고 ‘잘못 했다가는 자기가 삐라를 뿌렸다고 토벌대의 오해를 받아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해서 삐라 한 장도 손에 넣지 않고 돌아왔다고 부인에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러나 가택에 대한 감시는 심했다고 한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온 동네 집집마다 감시를 당했다고 한다. 무슨 소리만 조금 나도 그냥 들이닥쳤다고 한다. 하루는 아기 기저귀를 갈아주고 뒷문을 열어 기저귀를 내치려고 하고 있는데 그 문 앞에 남자들이 ‘과짝과짝(많은 수의 남자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는 의미)’ 서 있었다고 한다. 겁이 나서 기저귀를 내치고는 문을 확 닫으니, 이제는 앞문으로 와서는 ‘무엇을 염탐하려고 뒷문을 열었냐’며 갈구더라는 것이다. ‘기저귀를 내치려고 문을 열었다’고 하니 거짓말을 한다면 더욱 못살게 굴었다고 한다. 그래도 그 정도는 나았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의 죽음
4·3 때는 경찰이라고 해서 ‘허드렁한 것들, 건달뱅이 같은 것들’이 잘난 척 하면서 사람들을 못살게 굴었다고 한다. 죄 없는 사람을 때리고 끌고 가는 경찰관들의 행동은 지나쳤다고 이야기 한다. 용담1동에서는 한천 다리 우측 지경에서 70명이 경찰에 의해 총살된 적도 있다고 한다. 그 안에는 아기를 업은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총살 후에 시체를 치우라고 하자, 동네 사람들은 그 70명을 내왓당 근처 서편 밭에 구덩이를 파서 가마니로 시신들을 옮겨 담아 흙을 덮었다고 한다. 후에 유족들이 옷으로 시신을 구분해 모두 찾아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비행장 근처(현 제주 국제 비행장) 다끄네 우측 편에서도 총살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그 근처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은 아직도 그때 당시 고무신이나 신발을 심심찮게 발견한다고 한다.
마을 소개와 학살
신옥년은 그때 문간에 서서 총살당하기 위해 실려 갔던 사람들을 살짝 보았던 기억을 말하곤 했다. 당시 화물차에 주민들을 태우고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하면서 총을 든 경찰관, 군인들의 감시하에 수송이 이뤄졌다고 한다. 신옥년이 한청(대한청년단의 약칭, 서북청년단과 혼동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재차 물었으나 한청이라고 하였음) 소속이었던 조카한테 들은 바로는 한청에서 한청 조직원들에게 나오라고 연락이 와서 나가면 양쪽으로 길을 길게 파놓게 해서는 마을 주민들을 불러내고 눈을 감으라고 하고서는 서로들 ‘빨갱이’를 골라내라고 해서는 총살을 시켰다고 한다. 그때 모략으로 죽는 경우들도 많아서 이승만 때 ‘개인 유감으로 억울하게 죽는 사람이 많다고 개인 유감으로 하지 말라’고 방송이 나간 적도 여러 번 있다고 한다. 때때로 총탄이 아까워 죽창이나 쇠고챙이 막대로 죽이기도 했다는데, 총살과 동시에 시신이 구덩이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면 한청원들이 흙을 지쳤다고 한다. 흙을 지치면 피가 땅 위로 ‘바각바각(아주 많이)’ 솟았다고 한다. 그리고 한청원들의 행동을 하나하나 감시하는 윗 조직원들이 옆에 서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이런 총살 행동에 대해서 반항하거나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행위와도 같아서 사람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때 제라한 사람은(진짜 공산당을 의미함) 안 죽고 억울한 사람 많이 죽었다’라는 말은 이곳에도 해당되는 문구였다.
덕례 이야기
제주시 도령루라는 지경에서도 4·3 때 사람들이 많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잠시 운이 좋은 경우가 있었는데, 총알을 피해 살아난 사람이 죽은 척 하고 있다가 토벌대가 가고 나서 눈을 피해 살아나온 경험담이다. 도령모루라고 하는 지경은 비행장 우측 소낭밭 가운데 있는 곳인데, 덕례라고 하는 사람이 총살되는 사람들 사이에 끼여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운이 좋아 총알을 맞지 않았는데, 그녀는 ‘턱’ 쓰러져서는 죽은 척 하고는 경찰관들이 다 돌아가고 나서 인근 ‘다끄네’ 근처에 숨어 와서 채(곡식을 담는 농기구) 하나를 들고 수건을 써서 밭에 다녀오는 것처럼 위장하고는 마을로 돌아와서 시어머니 보호 아래 고팡에서 2년 간을 숨어 살았다고 한다. 더욱이 바깥채에는 육지 군인이 살고 있었는데도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팡(곡식 창고)에서 밥을 먹고 볼 일을 보고 그렇게 2년을 지내다, 마을에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소문이 돌아 가택 조사를 당해 잡혀서 바닷가에서 시어머니와 함께 수장 당했다고 한다. 그 때 아이들은 한순간에 고아가 되어서 큰 아버지가 살고 있는 전라북도 군산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대한청년단
신옥년은 4·3 당시 토벌을 했던 집단으로 한청을 기억했다. 필자가 서청(서북청년단)은 아니었느냐고 되물었지만, 신옥년은 한청이었다고 이야기하며, ‘무식한 것들이 특무대여, 한청원이여 하며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자기네 마음에 든 게 있으며 모두 가져가 버리고 했다’고 이야기한다. 한청 사무실은 용담1동 현 태광식당 2층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신옥년의 기억에는 서북청년단보다 대한청년단에 대한 기억이 더 강하게 남아 있는 듯 했다. 그러면서도 북한서 온 서북청년단들도 문패도 볼 줄 모르는 것들이 모두 경찰관이 되어 사람 죽이는 것을 일도 아닌 것처럼 죽여버렸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는 서북청년단을 경찰관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 때 삶은 삶이 아니었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4·3이 끝나기 무섭게 이제 한국전쟁이 이들 삶에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