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T01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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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2동 |
집필자 | 문순덕 |
국민학생 시절
김금심은 1941년에 제주북소학교에 입학해서 5학년 때 광복되었다. 제주북소학교는 남녀반이 따로 분리되어 있었다. 남자는 2학급, 여자는 1학급이었는데 광복 후에 일본에서 고향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학생수가 많아졌다. 1, 2반은 정상적인 취학생들이고, 3반은 나이 많은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한 학급은 남녀혼성반이었다고 한다. 김금심은 김홍식처럼 제주북국민학교에 다녔는데 입학할 때 경험은 부부가 비슷했다. 김금심이 국민학교 입학 면접 시에 면접관이 시계를 옆에 놓고 좀 전에 몇 시였느냐면서 시계 읽는 법을 질문하면 어리벙벙하게 앉았다가 떨어지는 학생도 있었다고 한다.
점심시간과 소풍
김금심은 성안의 유지 집안이어서 쌀밥을 가져갈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제주시 사람들은 도시락(알루미늄으로 만든 벤또)을 갖지 못했다. 시골에서 제주시로 유학 온 학생들은 차롱(대나무로 만든 그릇)에 밥을 담아오기도 했다. 대나무로 만든 차롱은 공기가 잘 통하니까 음식이 변하지 않는 장점이 있다. 플라스틱에 음식을 오래 담아두면 대나무그릇보다 음식이 빨리 변한다. 일제강점기는 누구나 가난했기 때문에 점심을 싸 오기도 어려워서 고구마 두 개로 때우기도 하는 등 점심을 가져오는 학생은 드물었다고 한다.
김금심 학창시절엔 소풍이란 특별행사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전쟁을 겪으면서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없었다. 즉 일제강점기 말에는 집단으로 모여 다니면 감시를 하고 4·3사건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피난민이 있는데 소풍은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전쟁과 학창시절
김금심은 제주북국민학교 졸업 후에 상급학교에 진학하려니까 친정어머니가 딸자식을 멀리 보내는 것을 걱정해서 목포 여학교는 보내주겠다고 했다. 본인도 타지에 유학 가는 것이 두렵고 걱정이 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순천에 외할아버지가 살고 있어서 순천여중에 가려고 했는데 친정어머니가 조금 반대해서 가지 못하고, 또 그 당시는 부모의 뜻에 순종하던 시절이기도 해서 제주여자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고 한다. 1947년 3월에 여중생이 되었다. 그 당시 제주여중은 동문통(재일교회 부근)에 있었다. 김금심은 학창시절을 현대사의 질곡 속에 보냈다고 한다. 국민학교 다닐 때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고 광복 후 혼란기에 정상적인 수업을 잘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중학교에 입학해서 관덕정에서 3·1운동 기념식이 있었고 이것이 효시가 되어서 1948년 제주의 비극인 4·3사건이 일어났다. 이때가 제주여중 2학년 때라 역시 제주 사회가 혼란스러워서 정상적인 공부를 할 수 없었다. 4·3사건 때 김금심은 여학생이어서 집에 숨어있었다. 잘못하면 잡혀간다는 소문도 있어서 부모님들이 밖으로 나다니지 못하게 했다. 또한 휴교령이 내려서 학교 수업도 안 되었다. 제주북초등학교에서 3·1운동 기념식은 참석했고, 남자들이 가마니에 구호를 쓰고 몸에 걸치고 다니는 것을 본 정도라 한다.
가고 싶었던 대학 진학 좌절
김금심은 제주여중 3년을 졸업하고 학제가 4년이고 봄에 학기를 시작하다가 6~7월로 옮기고 한국의 학제 혼란기에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6·25전쟁이 일어나니까 서울로 대학에 진학한 여학생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 김금심은 4년제 중학교에 다녔다. 3학년 때 7월로 학기가 바뀌면서 대학에 진학할 수 있게 제도가 바뀌었다. 1950년 6월 23일 서울로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 당시는 교통수단이 여객선밖에 없었다. 통신망은 편지나 전보만 가능했다. 친척 언니가 제주여중을 졸업하고 간호전문대학(서울대학 간호과 정도?)에 입학할 거여서 그 언니 따라서 6월 23일 제주를 출발해서 24일 저녁에 서울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 때 친정아버지가 6월말에 출장을 받아서 같이 동행할 것이니까 출발을 늦추라고 했다. 7월에 새학기가 시작되니까 김금심 친구는 숙명여고에 편입해 있어서 김금심도 그렇게 하려고 서울로 가려고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친정아버지 때문에 제 날짜에 갈 수 없었다. 그런데 1950년 6월 25일에 한국전쟁이 일어나니까 진학은 무산되었다.
김금심이 아버지를 원망하니까 친정아버지가 하는 말이 “정말로 너를 공부를 안 시키려고 한 것도 아니고 대학을 안 보내려고 한 것도 아닌데 시대를 잘못 만났으니까 이렇게 살아 있는 것도 다행이라 생각하라.”는 말로 위로해 주었다고 한다.
김금심 남편(김홍식)의 경험을 보면 1950년대만 해도 여학생이 대학교에 입학하면 좋은 신부로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1957년부터 제주대학(국어국문학과 교수)에 근무했는데 그 때는 여학생이 잘 입학하지 않았다. 여대생이 대학생활하기가 심리적으로 불편해 한 것은 주변에서 여대생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고 싫어하는 기색이 많았기 때문이라 한다. 남자들도 신붓감으로 고졸은 인정했지만 대졸 여성은 좋아하지 않았다. 이는 여성의 높은 학력을 인정하지 않았던 가부장제사회이며 여성은 혼인을 통해서 한 인간으로 대접했던 것 같다. 이런 의식은 후기산업사회인 지금도 남아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