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T01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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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2동 |
집필자 | 문순덕 |
정치·문화 일번지
삼도2동은 제주시의 중심지로서 제주목 관아가 있는 곳이며 제주특별자치도의 정치·문화 일번지라 할 수 있다. 삼도2동에는 우체국, 시청청사, 법원, 중앙의원 등 문화시설이 집중되어 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에도 제주도의 주요한 관공서가 있었던 곳이며, 상권이 번창했었다. 그러나 제주시의 시가지 개발에 맞물려서 1980년대 중반부터 인구이동이 나타나면서 상권이 쇠락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아직도 중앙로, 칠성통, 동문시장, 산지천 등 주민들의 생활권과 밀접한 지역이며, 탑동이 매립되고 호텔과 대형마트가 들어서면서 또 하나의 상권이 형성되어 있다. 삼도2동에는 제주교육의 산실인 제주북초등학교가 상징적으로 남아있다. 젊은 인구가 유입되지 않아서 북초등학교 학생수가 감소하는 비극도 발생했지만, 이 초등학교만은 살려야 한다는 동문들의 의지가 강하다.
제주시 삼도2동은 이렇게 역사적인 의미가 강한 마을이다. 보통 한 마을을 행정동으로 구분할 때 역사가 오래된 곳을 1동이라 하는데 삼도동은 예외적으로 묵은성[古城] 일대가 2동이 되고 제주시 중앙여자중학교 서쪽 대도로를 기준으로 해서 서쪽 방면을 1동으로 구분해 놓았다.
묵은성은 관공서 지역
제주도지사 관사는 지금 노인회관(노인대학원) 바로 앞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부터 제주목 관아를 중심으로 해서 관공서가 모여 있었다. 우선 제주목 관아 주변에 있던 관공서에는 제주도청, 제주경찰서, 제주세무서(제주목 관아 확장 공사 터), 그 아래에 법원이 있었다. 제일은행 자리는 금융기관이 모여 있었고 현재 로베로 호텔 자리는 제주차부(제주시외버스터미널)였다. 이렇게 제주시 핵심 생활권이었던 묵은성이 1980년대 중반 이후 옛 영화를 간직한 채 부활을 꿈꾸고 있다.
즉 묵은성에 있던 관공서(관덕정 북쪽에 검찰청과 법원이 있었고, 동쪽에는 경찰서와 우체국, 서쪽에는 도청, 도지사 관사는 북초등학교 정문 앞 노인회관터에 있었음)가 주로 1980년대 중반부터 다른 곳(광양로터리에서 한라산 방면)으로 옮겨가면서 이곳은 옛 영광만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김홍식은 묵은성에 관공서가 집중되어 있을 때는 걸어서 민원을 해결할 수 있어서 편리했다고 한다. 그 당시는 주로 걸어 다닐 때였지만 지금은 대중교통수단이 발달해서 멀리 있어도 불편함을 모르겠다고 한다.
묵은성에는 제주 토호들이 살았는데 안정된 선비나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살았다고 볼 수 있다. 묵은성이 제주시 중심지였는데 1980년대 중반부터 주민들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많이 주거지를 이동하게 된 것은 도시화 개발정책에 따라서 신시가지를 확장시키고 아파트를 많이 지으면서 젊은층들이 빠져나갔다. 원주민들도 형편에 따라서 다른 곳으로 이사 가면서 옛 사람들이 거의 없어지고 있다.
삼도2동 인구가 9천명을 조금 넘는 정도여서 인구수에 큰 변화는 없지만 젊은이들이 들어오지 않고 아파트형 주택이 새로 건설되지 않으니까 새로운 도시 맛이 없다고 본다. 묵은성에 상가가 조성되면서 상대적으로 주택이 사라지니까 자연히 주거지가 옮겨졌다.
김홍식은 지금 거주지에서 한 50년 정도 살아서 모든 것이 익숙하고 일상생활권이 편리하니까 다른 곳으로 옮길 생각을 해 보지 않았다고 한다. 삼도동이 주택가였는데 1980년대 중반에 탑동이 매립되고 중심도로가 연결되면서 도시가 점진적으로 팽창되었고, 호텔과 상가가 들어서면서 상가지역으로 변모되었다고 한다.
성안(城內)
제주시라고 하는 것이 옛날에는 성안이라고 했다. 성안이라고 하는 것은 남문, 서문, 동문을 중심으로 해서 그 안을 가리킨다. 적은 면적이지만 성안을 중심으로 해서 도시가 번창했으며, 예로부터 부호들도 많이 살았다고 한다.
성안(城內)은 소위 사대문 안을 가리킨다. 지금도 오현단(제주시 남문로터리 동쪽에 성곽이 복원됨)에 성의 일부가 남아있으며 성담은 오현단에서 출발해서 남초등학교와 제주대학병원 사이로 해서 현대극장이 있던 곳을 지난다. 관덕정 뒷길로 돌면 성 울타리가 된다. 김홍식 집 근처를 진성동(陳城洞)이라 했으며, 집 앞 길은 성굽(성담을 쌓았던 곳)에 해당된다. 동쪽으로 측후소(기상대가 있던 장소)를 못가서 산짓물(제주시 건입동 산지천에 있는 우물)이 있어 그 부근으로 성담이 끝났다.
김금심도(김홍식 아내) 어린시절에 집 앞 도로를 성굽이라 불렀다 한다. 그래서 목관아지 일대를 묵은성이라 부르는 것이다. 김홍식이 어린 시절에 사람들이 어디 사느냐고 물으면 ‘성내’에 산다고 대답했다. 성내, 성안은 칠성통을 중심으로 해서 제주시를 의미했다.
성이 있으니까 성문이 네 개 있어야 하는데 남문로터리쪽은 ‘남문’이고, 동문로터리쪽은 ‘동문’이라 짐작하지만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병문천이 있는 서문다리와 관덕정 사이에 ‘서문’이 있었고, 북문은 바다 쪽이어서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 한다.
칠성통의 역사(본정통)와 상권
일제강점기에 제주도는 전라남도의 행정구역에 속했기 때문에 제주도(濟州島)였다가 1946년에 제주도(濟州道)로 승격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제주도 책임자를 ‘도사’(島司)라 했으며, 경찰서장을 겸직했다. 또한 제주읍 산하 주재소(현재의 파출소) 주임도 모두 일본인(소학교 교장도 일본인임)이 맡았으며, 면장만 한국인이었다.
지금의 제주시는 ‘제주면→제주읍→제주시’로 행정구역 단위가 바뀌었는데 김홍식이 초등학생일 때는 제주읍이었다. 그 당시 제주읍에는 공립 초등교육기관으로 제주북초등학교 하나가 있었고, 일본인들은 칠성통 일대를 생활근거지로 삼았다. 여기서 칠성통이란 제주시 중앙우체국과 동문로터리 사이며, 큰 길을 중심으로 해서 북쪽에 있는 상가 지역을 말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칠성통을 ‘본정통’이라 불렀는데, 이는 일본말로 일본사람이 사는 동네란 뜻이라 한다. 본정은 제주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어느 지역을 가도 본정이 하나씩은 있었다고 한다. 김홍식은 일제강점기 때 광주에서 중학교를 다녔는데 그 당시에도 광주 본정통이 있었다고 전해주었다. 즉 원래는 ‘일본정’인데 ‘일’자를 빼버리고 그냥 본정이라 불렀다.
일제강점기에는 주로 일본사람들이 칠성통의 상권을 잡았는데, 제일 큰 상점들은 지금의 백화점과 비슷하고, 일종의 종합상사여서 잡화, 문방구 등 많은 것을 취급했다. 그 당시 칠성통 상가에서는 주로 생필품을 팔았는데 일본 사람들이 경영하는 상점은 조금 고급스러운 물건이 있었지만 보통사람들은 이용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칠성통 상점 주 고객은 성안 사람들이고 그때는 먹고살기 어려웠던 시절이라 시골 사람들은 이용하지 않았다. 제주 사람들은 일용잡화(양말, 신발 등)를 주로 구입했다. 시장은 오일장밖에 없어서 집안에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기다렸다가 오일장에 가서 구입할 정도였다고 한다.
관덕정 가장자리는 매일시장이 섰던 곳이다. 매일시장에는 야채가게, 정육점, 과일가게가 있었고, 관덕정 맞은편 남쪽 국민금고가 있던 곳은 식산은행터다. 그 동쪽으로 가면 비단가게(이화평 씨가 주인임)가 있었다. 이 비단가게는 주로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묵은성 주민들이 고객이었고, 중국제품을 팔았다. 일제강점기에 비단가게(삼도2동과 일도동의 경계임)가 둘 있었는데 광복 후에는 없어졌다.
제주시 오일장의 변천
김홍식이 7~8세에 산지포구(제주시 건입동 바닷가)로 가는 쪽에 제주시 최초의 오일장이 있었으며, 광복 후에는 이 오일장이 남문통(제주시 남문로터리 일대)의 제주시민회관이 있던 자리로 옮겼다. 시가지가 개발되면서 인구가 이동하니까 오일장도 이전했는데 당시만 해도 그 일대는 밭이었고 4·3사건(1948년에 제주도에서 발생한 민중봉기) 후에야 개발되기 시작했다. 남문통에서 한 5년 정도 오일장이 섰는데 이곳에 인구가 밀집되니까 다시 1960년대에 서사라로 이동했다. 지금의 적십자회관 서쪽에 오일장을 만들었다. 그 후 한라병원 쪽으로 갔다가 사라봉 근처로 옮긴 것은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이다. 그 다음에 서중학교 근처로 옮겨서 지금 제주민속오일장이 형성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교통이 발달되지 않은 때니까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못해서 지금처럼 먼 마을에서 제주시 오일장에 올 수 없었다. 그래서 오일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주로 성안 사람들이었다. 성안이란 묵은성과 남문로터리 일대를 말한다.
탑동매립과 삼도2동의 도시화
김홍식은 묵은성을 중심으로 해서 삼도2동의 변화를 경험한 세대다. 묵은성에서 심하게 변화를 느낄 수 있는 곳은 산지천을 복원한 것과 탑동 일대를 매립해서 호텔 등 위락시설이 들어선 것이라 한다. 1980년대 중반에 탑동이 매립되었으니까 그 전에는 바닷가였는데 지금은 사람들의 생활공간으로 변해버렸다. 그 전에는 밀물과 썰물의 변화도 알 수 있고 바닷가에서 걷기도 했는데 지금은 너무 인공적이어서 삭막하게 느껴진다고 아쉬워했다.
김금심(김홍식 아내)은 삼도동에 사는 것이 떳떳하고 묵은성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외손녀가 서울에서 놀러오면 북초등학교의 역사도 말해주고, 외조부모, 외삼촌과 어머니까지 몇 대가 다녔다는 이야기를 해 주기도 한다. 북초등학교가 1907년에 설립되었으니까 2007년이면 100주년이 된다.
1980년대 중반부터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하면서 삼도2동은 주택가에서 상가로 변모하고 있다. 탑동이 매립되고 주변에 서비스업종이 들어오면서 덩달아서 묵은성도 변하고 있으며, 지금은 노후된 주택들이 있거나 폐허로 남아있는 집들이 있어서 죽어있는 동네 같다고 한다.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제주도로 피난민이 많이 들어왔으며, 묵은성에도 피난민촌이 형성되었다. 그들은 넓은 빈터에 천막을 치고 집단으로 거주해서 천막촌(피난민 천막촌이 있던 자리는 현재 창성이용원과 해수식당 일대임)이라 부르기도 했다. 피난민들이 제주시에 들어와서 빈터가 있으면 천막을 쳐서 생활했으며, 김금심 친정집 근처에도 천막교회가 있었다고 한다. 천막교회는 묵은성 통물(용천수로 식수였음)이 있는 곳에 세워서 찬송가 소리가 주변에 퍼지기도 했다. 주인이 없는 터는 말할 것도 없고 주인이 있는 빈터에도 천막을 설치해 버리면 나가라고 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또한 피난민들은 일반 민가에도 세 들어 살았다.
6·25전쟁과 피난민촌
김금심 친정집에도 피난민이 들어와서 살았다. 친정 밧거리에 그 당시 유한양행 부사장이 와서 살았는데 배급쌀을 받고 생활했다. 제주사람들도 가난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피난민들을 물질적으로 도와줄 형편이 아니었다. 거의 자급자족하던 시절이라 농사를 잘 지으면 보리밥을 먹을 수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끼니를 때우기도 어려웠다. 피난민이 제주에 와서 낯설어 한 풍경은 겨울에도 푸른색 채소를 보거나 먹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요즘은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그때만 해도 하우스 재배가 없던 시절이라 제철에만 볼 수 있는 색이었다. 그래서 다른 지방에서 온 사람들은 겨울에도 눈이 오는데 배추를 먹을 수 있으니까 살만 하다고 여기기도 했다. 제주도는 6·25의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으며, 피난민들이 내려오니까 실감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6·25전쟁 때 다른 지방에서 제주도로 피난민이 내려왔다. 다른 마을은 잘 모르지만 제주시 삼도2동에 이들이 집단으로 모여서 살던 천막촌이 있으며,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천막촌이 있던 곳은 창성이발관 일대라 한다.) -사진자료 설명
칠성통에 양장점 등장과 칠성통 양복점의 생명력
1950년대 중반에 칠성통에 양장점이 생겨서 김금심은 은행에 다닐 때 옷을 맞춰 입었다. 그 당시 민들레양장점이 있었고(옷을 꼼꼼하게 잘 만들었음), 그 후에 노라노양장점이 생겼고, 1970년대에는 하니양장점이 생겼다. 주로 성안 사람들은 이 세 양장점에서 투피스 등을 맞춰 입었다. 제주도에는 일본 친척들이 많이 있으니까 일본에서 구호물자가 오면 사다가 입거나 만들어 입었다. 그러다가 경제적인 여유가 있으면 맞춰 입거나 옷감을 사서 집에서 만들어 입었다.
김금심은 최근(2000년)까지 맞춰 입기도 했다. 주로 벤의상실(삼도동 소재), 에미의상실(광양 소재) 등을 이용했다. 기성복도 사 입었지만 집에 선물로 받은 옷감이 있으니까 만들어 입었다. 이런 옷감은 주로 결혼식 예단으로 받았으며, 예단은 양장지감이나 한복감이었다고 한다. 김금심은 나이가 들수록 기성복은 몸에 잘 맞지 않아서 할 수 없이 맞춤복을 이용하게 되는데 기성복은 젊은 세대를 겨냥하고 중년이나 노년층을 대상으로 한 디자인이 부족하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김홍식은 결혼할 때부터 지금까지 맞춤복을 입는데 칠성통에서는 봉라사를 시작으로 해서 동하양복점을 이용하며, 기성복은 몇 벌 안 사 입었다. 김홍식이 맞춤복을 애용한 것은 오른쪽 어깨가 조금 기울어서 체형에 맞게 만들어 입기 위함이라 했다.
지금은 기성복 옷감이나 디자인이 아주 좋아서 양복점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광복과 6·25전쟁 후 경제 산업이 발달하지 못해 양복천도 배급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1955년 이후에 틈틈이 공장에서 옷감을 만들기도 했지만, 1955~6년경에도 여전히 양복천을 배급했다. 김홍식 부친이 칠성통에 한양상회(잡화상)를 운영할 때 거기서 배급했고, 공무원들에게도 배급해 주었다고 한다.
제주시에 극장 등장
해방 직전에 제주시에 영화관(현대극장이며 지금은 없어짐. 영화가 사양일 때 경영난으로)이 생겼다. 김금심은 부모님 심부름을 할 때 극장 앞을 지나가야 하는데 학생은 절대로 극장에 들어갈 수 없으므로, 초등학교 1·2학년 때에 그 앞을 지나려면 걸릴까 봐서 숨이 콱콱 막혔다고 한다. 중앙극장은 광복 후에 생겼으며 중앙로터리에서 탑동 방향으로 내려오면 서쪽(대동약국 맞은편) 도로변에 있었는데 지금은 도로로 변했다.
김금심은 주로 1950년대에 영화구경을 다녔는데 집에서 제주극장보다 중앙극장이 가까워서 자주 다녔다고 한다. 그 후에 제일극장이 생겼으며 동양극장은 아주 뒤에 만들어졌다. 그런데 영화극장이라고 해도 옛날에는 쇼를 많이 공연해서 이미자 공연도 보았다. 중앙극장에서 가수들이 공연한 것은 한 1960년대 중반이라 한다.
영화관람료가 얼마였는지 기억은 없고 주로 친정어머니가 내주었다고 한다. TV도 없을 때니까 저녁 먹고 딱히 할 일이 없으니까 “빨리 나오라. 극장 구경 가게.” 하면 영화관에 가서 보다 보면 “아 저건 어저께 그저께 본 거구나. 또 한번 봐졈구나.” 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김금심은 친정어머니가 같이 가자고 하니까 제주극장과 중앙극장을 누비며 다녔다. 대중적인 놀이 장소가 없으니까 일반적으로 극장이 성황을 이뤘다. ‘이미자쇼’, ‘배삼룡 공연’, ‘홀쭉이와 뚱뚱이’, ‘오춘자와 장소팔 만담’ 등 많이 구경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TV가 나오면서 극장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김금심은 일본에서 1971년에 친정어머니가 TV를 사왔으니까 지금 살고 있는 집에 이사왔을 때라 한다. 제주북초등학교 동북쪽에 주택이 조금 있을 때여서 친정부모네가 TV를 처음 사고, 그 다음에 김금심네가 샀으니까 TV 있는 집이 드물었다고 한다. 극장 시설이나 환경이 좋지 않아서 이때부터 극장가는 횟수는 줄어들고 주로 집에서 TV를 보았다고 한다.
상수도 이용하기
삼도2동 사람들은 해안가 용천수를 많이 이용했다고 한다. 김금심이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해안으로 약 200~300m 내려가면 우물이 있었다. 집안에 우물이 있으면 펌프를 사용하기도 했다. 어른은 물허벅(물동이)을 이용하고, 어린이는 대바지(어린이용 물동이)를 사용했는데 일제강점기에 흙으로 빚은 허벅도 있었지만 해방 후에 양철로 만든 허벅도 나오기 시작했다.
김금심은 삼도2동에 살았으니까 이 동네는 집 마당에서 우물을 파면 대개 물이 나왔다고 한다. 김금심도 친정이 집을 지으면서 약 20m 정도 파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었다. 그래서 식수도 자급자족을 하고 동네에 공동 우물이 있어서 그것을 이용하기도 했다. 우물을 파다가 암반이 나오면 다이너마이트 같은 폭약을 이용했다. 폭약은 손가락 정도 긴 것을 사용하고, 한 세 군데 집어넣어서 폭파시켰다.
"우리가 결혼해서 수돗물이 나올 때까지 우물을 이용했으니까 1957년에 결혼하고 한 1963년에 상수도 시설이 된 것 같아요."
그 당시는 공동수도가 아니고 집집마다 수도 파이프를 묻는 개인수도를 설치했다. 제주시에서 상수도 시설을 맨 처음 한 곳은 잘 모르고 삼도동 근처에는 산짓물, 금산물이 있었다. 금산물은 한전발전소 있던 자리이다.
용담동 사람들은 선반물을 이용하고 묵은성에 통물이 있어서 삼도동 사람들은 두레박으로 허벅에 길어다가 먹었다. 선반물(용천수)은 탑동 소방서 맞은편에 있었으며, 주변 사람들은 이 물을 식수로 이용하고 빨래도 했는데 병문천을 복개하면서 이 물통이 매립되었다. 삼도2동 주민들은 관덕정을 기준으로 해서 동쪽은 산짓물을 이용하고 서쪽은 선반물을 이용했다.
묵은성의 공장들
한일소주 공장은 처음에 삼도2동 김금심 집에서 북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도로가 되었다. 유창산업은 유채공장인데 지금 오리엔탈호텔 서북쪽 소방서가 있는 자리에 있었다. 제주도에서 재배한 유채를 전부 수매해서 기름을 만들었고 주로 일본으로 수출했다고 말해 주었다. 삼도2동에는 유채공장과 한일소주 공장 말고도 양조간장공장이 있었다. 광복 후에 생겼는데 묵은성 통물에서 바다쪽으로 쭉 내려가면 있었다. 양조간장공장 주인은 제주도 사람이며 육지에서 대량생산된 양조간장이 들어오면서 수지가 맞지 않아 그만두었다. 양조간장공장도 제주 사람에게 운영권을 넘겼지만, 기술도 부족하고 공장도 확장해야 해 판로가 없어서 중단되었다고 한다.
6·25전쟁 때 공장도 피난 온 셈인데 세계고무공장이 있었다. 제주대학교사범대학 부설 고등학교 근처 바닷가에 가건물을 지어서 고무를 생산했다. 지금은 두 갈래 도로가 되었다. 이를테면 국가가 원조해서 지은 공장이며 고무신을 만들어서 육지부로 팔았다. 김금심 남편(김홍식)도 이 공장에서 고무신을 사 신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서울수복 후에 공장도 철수되었다.
해방 후에 삼도동 출신이 청주(정종)공장을 경영했다. 김금심이 어릴 때 청주공장에 가서 구경하기도 했다. 만드는 과정을 기억해 보면 쌀을 찧어서 밥을 만들고 발효시켜서 항아리에 담고 숙성시킨다. 쌀이 트면 그것을 건저내면 청주가 된다. 술 찌꺼기는 단무지를 만드는데 활용했다. 이웃마을 사람들은 쭈생이(찌꺼기)를 사다가 나무통에 시들시들하게 말린 무와 켜켜이 재겨 놓는다. 어릴 적 먹었던 단무지를 만들어서 먹고 싶지만 재료가 없어서 만들어 먹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아있다고 한다. 김금심이 처녀 적이니까(한 스무 살 정도임) 6·25전쟁 이전의 경험이다. 그 후 15년인가 운영하다가 육지부에서 대량생산으로 청주가 들어오고 여기서는 다른 지방으로 판로가 없고 도내 소비가 잘 되지 않아서 경영이 중단되었다.
칠성통 미용실과 사교춤의 등장
김금심이 은행원 시절이니까 1954~5년쯤에 제주시에 처음으로 미장원(상호는 기억이 나지 않음. 미용사는 고애린 씨며 92세 정도임)이 생겼는데 지금 제주은행본점 자리에 있었다. 이 당시 직장여성을 대상으로 파마를 했는데 생소해서 잘하지 않았다. 어쩌다 파마를 하면 부끄러워서 집에 들어오기가 어색하던 시절이다. 그 당시는 불파마라 했다. 그때 미용기술보다는 자본이 있으면 미용실을 차렸다. 처음에 불파마를 해서 집에 들어가면 엄한 아버지들은 가위를 들고 잘라 버리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김금심은 처음에는 귀밑머리 끝부분만 파마를 했다고 한다. 그 당시 파마 비용은 이백~삼백원 정도라 한다. 1955년 이후 1960년을 넘으면서부터 여러 군데에 미용실이 생겼으며, 그 당시 미용사들은 서울에 있는 미용실에 가서 몇 달씩 배워왔다. 칠성통에 오고파 미용실도 있었는데 오래 운영되었다고 한다.
제주시에서는 주로 1960년대 초반에 양춤이 유행했는데 가정집에 모여서 축음기를 켜 놓고 춤을 배웠다고 한다. 대부분 서로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춤선생(남자)을 청했다. 또한 먼저 배운 사람이 가르쳐 주기도 했는데 약 10년 간 유행했다고 한다. 양춤이 유행하면서 가정불화가 생기기도 했다. 제주시 동문로터리 ○○ 약국 2층에 무도회장이 있어서 동문시장에 간다면서 오후 2시쯤에 장바구니를 들고 이곳을 드나든 가정주부들로 있었다고 한다.
대중목욕탕
김금심의 기억을 더듬으면 대중목욕탕이라고 하는 것이 일제강점기 제주시 칠성통과 건입동에 두 곳이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목욕탕을 1년에 한번 정도 갔는데, 주로 정월 명절을 위해서 섣달 그믐날에 가는 정도였다고 한다. 이 때는 물이 귀하니까 목욕탕에 가도 물을 아껴 썼으며 물을 길어다가 집에서 몸을 씻는 정도였다고 한다. 주로 커다란 가마솥에 물을 가득 끓여서 부엌에서 목욕을 하고 머리도 감았다고 한다. 목욕탕이 요즘처럼 크지 않고 욕탕도 자그마한데 몸의 때가 떠 있으면 잠자리채 같은 것으로 때를 건져냈다고 한다. 제주읍 사람들이 다 이 목욕탕을 이용했다고 볼 수 있고, 너무 오래되어서 목욕비는 기억하지 못하겠다고 한다.
김금심은 어린 시절에 친정할머니가 깨순을 세제로 사용해서 머리를 감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깨순을 비비면 거품이 일어났다고 한다. 김금심은 1950년대 후반부터 일제 샴푸를 썼는데 보통은 형편에 따라서 세숫비누나 빨랫비누를 삼푸 대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김홍식(김금심 남편)은 광복 초기에 이발소에 가면 빨랫비누로 머리를 감았다고 한다.
탐라 입춘굿놀이
탐라국 입춘굿놀이는 탐라시대부터 제주선인들이 새해 시작인 입춘날 행했던 의례이다. 농경사회에서는 입춘을 진정한 새해로 보았다. 이 놀이는 입춘에 맞춰서 제주목사가 제주도내에 있는 심방(무당)을 불러 모아서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고 온 도민들의 평안을 기원했던 지방의 제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놀이는 대한제국 말기까지 행해지다가 일제강점기 문화말살정책이 시행되면서 중단되었다. 전통문화를 복원하고 개발하려는 의지가 높아지자 1999년 제주시와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제주도지회가 공동으로 이 놀이를 부활하고 2007년까지 전승해 오고 있다. 지금은 제주도의 대표적인 축제로 자리매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