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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박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11578
한자 密陽朴氏
영어음역 Miryang Parkssi
영어의미역 Miryang Park Cal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집필자 김동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시기/연도 1637년(인조 13)연표보기|1716년(숙종 42)연표보기|1592년(선조 25)연표보기|1753년(영조 29년)연표보기
성씨시조 박언침(朴彦忱)
입향시조 박자호(朴自好)|박효신(朴孝臣)|박여와(朴汝洼)|박후신(朴厚信)|박리준(朴履準)|박태호(朴泰鎬)

[정의]

박언침을 시조로 하고 박자호 등을 입도조로 하는 제주의 세거 성씨.

[연원]

전체 박씨의 도시조는 신라의 박혁거세이며, 그 후로 파사왕(婆娑王)계와 일성(逸聖)계로 나누어 졌고, 일성왕계는 다시 경명왕계와 경애왕계로 분파되었는데 밀양박씨를 비롯하여 일명 팔대군파(八大君派)로 부르는 박씨는 경명왕의 후손들이다. 그 가운데서도 밀양박씨는 박씨의 대종을 이루고 있으면서도 장파[八大君派中]가 된다.

밀양박씨의 시조는 밀성대군 박언침(朴彦忱)이고, 박언침의 7세손 도평의사 박언부(朴彦孚)를 중시조로 하는 은산군파·행산공파·좌상공파·규정공파·사문진사공파·밀직부원군파·밀성군파·도평의사공파·좌복야공파·밀직부사공파·판도공파·좌윤공파 등이 있다. 여기에서 진원박씨·문의박씨·반남박씨·영암박씨·창원박씨·나주박씨·진주박씨·운성박씨 등이 분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입향경위]

박자호(朴自好)는 시조 박혁거세의 59세손이며 중시조 규정공(糾正公) 박현(朴鉉)의 15세손, 연안공(延安公) 박승조(朴承祖)의 2세손으로 통덕랑(通德郞)을 역임하였다.

박자호(朴自好)의 아버지인 연안부사 박승조(朴承祖)가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1637년(인조 13) 유배가 풀리고 출륙할 때 가족을 남겨두고 떠났다. 그래서 박승조(朴承祖) 아들인 박자호(朴自好)가 남아 입도조가 되었다. 한편, 밀양박씨 규정공파문중과 후손들은 박승조의 유배설에 대하여 포저(浦渚) 조익(趙翼)이 쓴 연안부사박공묘지명(延安府使朴公墓誌銘)을 근거로 박승조가 제주에 유배를 간 사실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대신 박승조가 선조대에 제주목 교수관으로 갔다가 제주에서 나주김씨를 만나 박자호를 낳았으며, 이로 인해 박자호가 제주의 입도조가 되었다고 보고 있다.

박효신(朴孝臣)은 시조 박혁거세의 56세손으로 고조(高祖) 박추(朴樞)가 제주판관으로 부임할 때 따라왔다가 출륙하지 않고 정착하였다. 후에 가선대부에 올라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박여와(朴汝洼)는 시조 박혁거세의 60세손이며 중시조 규정공(糾正公) 박현(朴鉉)의 17세손이다. 1716년(숙종 42)에 어지러운 정국을 피해 입도하여 제주목 오늘의 오현단 앞에 정착한 후 은둔하였다.

박후신(朴厚信)은 시조 박혁거세의 51세손으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쟁을 피해 입도하여 애월읍 어음리에 정착하였다. 입도 후에는 지방 자제들을 교육하고 도민 교화에 힘썼다. 박후신(朴厚信)의 노력으로 애월읍 어음리 일대에는 일찍이 교학의 기풍이 진착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정자(正字) 동산’, ‘정자(正字) 내’ 등의 지명이 전해진다.

박리준(朴履準)은 시조 박혁거세의 57세손으로 1722년(경종 2)에 우마상으로 출륙하였다가 울산에서 귀향하던 제주 출신 양씨 청년을 만나 뜻한 바 있어 박리준(朴履準)와 함께 입도하여 애월읍 장전리에 정착하였다.

박태호(朴泰鎬)는 시조 박혁거세의 58세손으로 전라남도 광주에서 출생하였으며 1753년(영조 29년)에 당시 목사와 함께 입도 정착하였다. 제주 입도 후에는 글을 벗하였고 문장이 출중하였으므로 당시 세인들이 남하거사(南下居士)라 칭하였다.

[현황]

제주도에 세거하는 밀양박씨는 대부분이 규정공파(糾正公派)와 은산군파(銀山君派)이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2.02.06 박승조의 유배지 및 박자호의 출생지 수정 박승조의 유배지로 애월읍 곽지리를 삭제함. 충남 연기군 전의면 출생이라는 기록을 삭제함.
2012.02.02 밀양박씨 입도조 박자호 내용 보충 밀양박씨 규정공파문중에서 제출한 자료를 검토한 결과, 문중의 주장을 함께 실어 기존 주장과 시각의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기에 문중의 주장을 보충함. 보충 내용은 아래와 같다. -한편, 밀양박씨 규정공파문중과 후손들은 박승조의 유배설에 대하여 포저(浦渚) 조익(趙翼)이 쓴 연안부사박공묘지명(延安府使朴公墓誌銘)을 근거로 박승조가 제주에 유배를 간 사실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대신 박승조가 선조대에 제주목 교수관으로 갔다가 제주에서 나주김씨를 만나 박자호를 낳았으며, 이로 인해 박자호가 제주의 입도조가 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용자 의견
관** 우리나라의 모든 朴씨는 貫鄕을 구별할 것 없이 신라 시조왕 朴赫居世를 유일조로 받들고 있으며, 모든 박씨가 그의 혈손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반남박씨의 시조인 朴應珠 또한 景明王의 제1자인 朴彦忱(密城大君, 밀양박씨의 도시조)의 14世孫으로 그때부터 반남으로 분적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1.10.31
박** 상기 연원중(아래 일부 복사)에
"밀양박씨의 시조는 밀성대군 박언침(朴彦忱)이고, 박언침의 7세손 도평의사 박언부(朴彦孚)를 중시조로 하는 은산군파·행산공파·좌상공파·규정공파·사문진사공파·밀직부원군파·밀성군파·도평의사공파·좌복야공파·밀직부사공파·판도공파·좌윤공파 등이 있다. 여기에서 진원박씨·문의박씨·반남박씨·영암박씨·창원박씨·나주박씨·진주박씨·운성박씨 등이 분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기중 반남박씨가 밀양박씨에서 분적되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수도 있으므로
재확인이 요구되며 불확실한 사항에 대해서 자료로 올린다는것은 자료의 왜곡만 가져올수 있음.
재확인하여 수정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메일 parkdk1115@naver.com) 2011.4.10 박동규
2011.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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