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115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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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濟州土官 |
영어음역 | Jeju Togwan |
영어의미역 | Native Official of Jej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김동전 |
[정의]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 제주 지역에 설치된 특수 관직.
[개설]
토관은 제주도를 비롯한 평안도·함경도 등의 일부 지역의 토착 세력에게 특별하게 주었던 관직이다.
[연원]
제주도에 토관제가 언제부터 설치·운영되었는지 알 수 있는 문헌 기록은 없다. 조선 시대 제주도의 토관제에 관한 첫 기록은 1394년(태조 3)에 나타나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그 전에 이미 제주도에 토관제가 설치·운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앙 정부는 토관의 자제들을 위하여 교육기관인 향교의 설치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물론 그것은 작폐의 근원인 토관 세력을 적절히 통제하기 위한 방안에서 마련된 것이라 파악된다.
그리고 부경(赴京) 시위종사자(侍衛從仕者)로 천호(千戶)·백호(百戶)에 임명한 조치는 당시 토관 세력 자제들의 ‘불귀경직(不貴京職)’하는 현상이 보편화되어 그 폐단을 시정하고자 취해진 것이었다.
[구조]
제주도 토관제의 구조를 이해하고자 할 때 가장 중요한 사료는 1404년(태종 4)의 기록이다. 이 기록에서는 토관의 명칭이 도천호(都千戶)-상천호(上千戶)-부천호(副千戶) 계열에서 도사수(都司守)-상사수(上司守)-부사수(副司守) 계열로 변화를 보인다.
성주·왕자는 도주관좌도지관·도주관우도지관으로 변화되고 있다. 다시 말해 1404년 이전의 토관 조직은 동반(東班)·서반(西班)으로 구분되는 평안·함경도의 경우와는 다른 양상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제주 지방의 갖는 특수성, 즉 탐라국 시대의 지배 체제였던 성주·왕자제에 기인해서 토관제가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변천]
제주 사회는 제주를 본관으로 삼는 성씨들, 즉 탐라국 이래의 토착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조선 왕조가 제주에 대한 지배권 강화라는 차원에서 취해진 1416년(태종 16)의 삼읍 설치는 제주의 토착 세력들에게는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이 절대적 권력을 가지고 제주 주민들을 지배하게 되면, 토착 세력들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제주의 토착 세력들은 어느 정도 중앙 정부의 일정한 보호 속에 제주도 주민들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해가고 있었다. 이러한 부류의 계층을 토관(土官)이라 부른다.
사실 토관직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제주도를 비롯한 평안도·함경도 등의 토착 세력에게 특별하게 주었던 관직이다. 이 세 지역은 중앙 정부의 정치력이 강하게 미치지 못하는, 소위 변방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평안도·함경도는 고려 시대 양계[만주와 접경지] 지역으로 다른 지역과는 차별성이 일찍부터 존재해왔다. 특히 고려 말에는 이민족의 침입이 끊임없이 이루어진 지역이기도 하다.
제주도의 경우는 탐라국이라는 독립된 국가로의 존재, 그 이후 원의 간섭 등이 잇달아 본토 지역과는 다른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이에 중앙 정부는 효율적인 지방 통치를 위해서 이들 지역의 토착 세력에게 토관직을 주어 회유해나갔다.
제주의 토착 세력에게 토관직을 수여하기 시작한 것은 1295년(충렬왕 21)에 탐라를 제주로 고쳐 목사를 파견하기 시작하면서 비롯되었다. 토관직을 수여받은 세력들은 주로 탐라국 시대의 지배층이었던 성주·왕자 계층이었다.
그러나 중앙 집권을 강력히 추진했던 조선은 지방 통치를 강화하게 되자, 토관은 오히려 지방 통치의 걸림돌이 됨에 따라 토관 세력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1404년에 취해진 제주 토관의 개정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취해진 조치였다. 특히 탐라국 지배층의 명칭이었던 성주·왕자를 각각 도주관좌도지관(都州官左都知管)·도주관우도지관(都州官右都知管)으로 개칭함으로써 공식적인 성주·왕자의 명칭은 사라지게 되었다.
토관 세력들은 제주에서 주로 연변 방어, 군마(軍馬) 고찰 및 목장 업무를 책임지면서 제주에서의 영향력을 행사해나갔다. 1416년(태종 16)에 삼읍이 설치되어 영향력이 축소되기에 이르자, 이들은 수령권에 강력히 대응하였다.
즉, 중앙 정부는 제주 주민에 대한 지방 통치를 수령을 중심으로 한 관권 주도형으로 운영하고자 한 반면, 제주 지방에 사회·경제적 기반을 두고 있던 토관 세력은 제주민에 대한 지배를 향촌 주도형으로 운영함으로써 제주 지역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에 토관 세력들은 독자적으로 결재인 도장을 가지고 수령에 대항하면서 제주 지방 행정에 참여해나갔다. 그들은 모두 아래에 관리들을 거느리며, 독소(纛所) 10개를 중심으로 각 70여 명씩 700여 명에 가까운 인적 구성을 가지고 제주 지방 행정에 관여하였다.
토관 세력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수령과 대항하면서도 때론, 수령에게 아부하며 결탁하고는 제주도민들을 침탈하였다. 수령은 막강한 중앙권력을 배경으로 제주에서 통치력을 행사해나갔으나, 그들은 제주의 풍속이나 지리를 전혀 모르는 다른 지역 출신이었기 때문에 토착 세력의 일정한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토착 세력의 불법을 어느 정도 묵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427년(세종 9) 중앙 정부는 토관 세력이 백성들을 침해하고 있다는 이유로 성주·왕자라 일컫는 유풍이 있는 좌도주관·우도주관만 두고 나머지는 모두 폐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는 토관 세력의 강력한 반발에 의해 큰 성과를 보지는 못하였다.
그러자 1429년(세종 11) 제주 토관에게 주어지던 봉족(奉足)의 수를 대폭 줄이는 조치가 이루어졌다. 이어 1445년(세종 27)에는 제주의 족성(族姓)들이 결재인 도장을 가지고 좌도지관·우도지관이라 일컬으며 지방 행정에 참여하는 것은 부당하므로, 이를 폐지하고 봉족의 수도 반으로 줄이도록 하였다.
특히 제주 경재소[지방의 토착 세력을 통제하기 위해 중앙에 설치된 연락 기구]로 하여금 제주 지방의 토착 세력을 규찰하도록 하였다. 토착 세력의 대응은 조선 중기까지 계속되다가 1601년(선조 34) 소덕유·길운절 역모 사건[소위 문충기의 난]을 계기로 급속하게 약화되었다. 이 사건으로 중앙 정부는 제주 토착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 및 연좌제를 실시하였던 것이다.
지방의 행정은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 홀로 해나갈 수 없었다. 원칙적으로 수령들에게는 자기 고향이나 인연이 있는 지역에 부임할 수 없는 상피제(相避制)가 엄격히 적용되었다. 따라서 수령들은 생소한 지역에 주로 임명될 수밖에 없었고, 그 지역 주민의 일정한 도움 없이는 행정을 운영해나갈 수가 없었다.
적어도 토관 세력은 16세기 후반까지 향촌 지배권을 잃지 않으려고 수령과 갈등을 빚었다. 그러다가 17세기에 이르러서는 점차 중앙 정부의 권력과 융합하거나, 집요한 중앙 정부의 집권화 시책에 굴복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수령의 통제 속에 군직(軍職)을 역임하거나 일부는 토족으로 진출하는 양상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