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11512 |
---|---|
한자 | 金石文 |
영어음역 | Geumseongmun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동전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돌이나 쇠붙이에 새겨 넣은 글씨나 그림.
[개설]
금석에 새겨진 문자나 도형은 쉽사리 마모되지 않고 오랜 세월 견뎌내기 때문에 내구성이 높아 과거의 사실을 고증하는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가진다. 금석문은 크게 금문(金文)과 석문(石文)으로 구분된다.
금문은 금속제의 용기, 악기, 무기, 화폐, 인장(印章), 경감(鏡鑑), 범종(梵鐘), 도량형 등에 주출(鑄出)되었거나 새겨진 문자이며, 석문은 석제의 비(碑), 묘지(墓誌) 등에 새겨진 문자이다. 특히 비에 새겨놓은 금석문은 대개 사건 당시, 또는 그와 가까운 시기의 상황을 기록하기 때문에 여러 분야에서 귀중한 연구 자료가 된다.
제주 지역에 남아 있는 금석문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석문이 대부분이며, 여기에는 선정비(善政碑), 사묘비(祠廟碑), 유허비(遺墟碑), 사적비(事蹟碑), 하마비(下馬碑), 정려비(旌閭碑), 효자비(孝子碑), 열녀비(烈女碑), 송덕비(頌德碑), 마애명(磨崖銘) 등이 있다. 2002년 제주시에는 선정비 61개, 열녀비 6개, 유허비 14개, 묘비 2개, 기념비 128개, 송덕비 69개, 공덕비 73개, 기타 51개가 있다
[선정비]
선정비는 제주도에서 흉년이나 가뭄이 발생하여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을 때 선정(善政)을 베푼 목사, 어사, 판관, 조방장 등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백성들이 세운 비석으로, 제주향교, 제주목 관아, 제주 삼성혈, 화북 비석거리 등지에 있다.
이러한 선정비는 일반적으로 관아 입구나 도로변에 무리를 짓거나 단독으로 세워지는 것이 특징이다. 선정비를 통해 당시 제주도에서 발생한 자연 재해와 구휼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다.
제주목사나 제주판관의 선정비가 많은 길을 제주에서는 ‘비석거리’라고 불렀다. 화북과 조천의 비석거리는 각각 13기와 7기의 비석군이 있다. 그 대상 인물은 화북 비석거리의 경우 제주목사 윤구동, 이원달, 이현공, 백희수, 구재룡, 홍공규, 심상연, 장인식, 임헌대 등이다. 또한 제주찰리사 이규원, 제주판관 고경준, 조방장 홍공재도 이에 해당한다.
조천비석거리의 경우 대상 인물은 제주목사 채동건, 백희수, 김수익, 이의식, 제주판관 김응빈 등이다. 선정비가 이 두 포구에 집중된 이유는 조천포구와 화북포구는 제주도의 관문 포구로, 조선시대 제주도와 한국 본토를 왕래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대부분 백성들이 이들의 선정이나 구휼을 칭송하기 위해 세운 경우가 많다. 특히 조천비석거리에는 공마감(貢馬監) 오영이 조천포구 뱃사람들의 모임인 도회(都會)를 혁파한 업적을 기록한 ‘공마감 오영구폐석(吳永救獘石)’에 ‘都會革罷 船人蒙惠玆庸銘勒 以傳千祀(도회혁파 선인몽혜 자영명륵 이전천사: 도회를 혁파하여 뱃사람들이 은혜를 입었다. 이에 공덕을 돌에 새겨 천 년을 전하노라)’라는 금석문이 남아 있다.
선정비 중 제주시 일도2동에 위치한 제주특별자치도민속자연사박물관에는 제주목사 ‘구재룡 선정비(具載龍 善政碑)’가 보존되어 있다. 선정비에는 비의 명칭과 선정 내용 및 백성들의 자세 등에 대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구재룡 선정비’를 보면, 앞쪽 가운데는 비석 명칭으로 ‘사상구공재룡휼민선정비(使相具公載龍恤民善政碑)’, 앞쪽 오른 편에는 선정 내용으로 ‘적조득중 요부무패(糴糶得中 徭賦無弊)’, 앞쪽 왼편에는 백성들의 앞으로 자세를 나타내는 ‘덕수남녀 영세불망(德垂男女 永世不忘)’, 또한 비가 위치한 장소로 ‘엄장면(嚴莊面)’이라는 비문이 적혀 있다.
이 선정비의 주인공인 구재룡은 무신이며, 제주목사 겸 방어사로 1839년(헌종 5) 3월에 부임하고 1841년(헌종 7) 윤3월에 파직되었는데, 재임 중 늠료 500여 냥을 내놓아 호적을 닦을 때의 인구미(人口米)로 충당하였으며, 가파도의 우축(牛畜)을 모동장으로 옮기어 방목시켰던 인물이다.
[효자비·열녀비]
효자비·열녀비는 유교 이념에 입각하여 이루어진 중앙 정부의 교화 정책에 의해 전국의 효자나 열녀의 행적을 칭송하여 세운 비이다. 열녀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열녀비로는 제주시 봉개동에 ‘열부여산송씨지유허비(烈婦礪山宋氏之遺墟碑)’, ‘사인강명봉처고씨효열지려(士人姜明鳳妻高氏孝烈之閭), 제주시 아라동에 ‘열녀처사전향원처 유인제주양씨지려(烈女處士田亨元妻 孺人濟州梁氏之閭)’, ’열녀학생오융복처 유인광산김씨기려(烈女學生吳隆復妻 孺人光山金氏之閭) 등이 있다.
이들은 남편이 병사하자 따라 죽거나 수절하여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었기 때문에 열녀비가 마을 내에 세워진 것이다. 효자비로는 김칭(金秤), 박계곤(朴繼崑) 효자비 등 제주도 전역에 24기가 남아 있다. 이들 각각의 비문에는 효행 및 열녀와 관련된 내용들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후세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유허비]
유허비는 고적(古蹟)에 세운 비석으로, 국어학자 이어령(李崇寧)이 글을 짓고 서예가 김충현이 글을 쓴 ‘명도암선생유허비(明道菴先生遺墟碑)’, 제주도 삼성설화와 관련된 ‘삼사석비(三射石碑)’, 그리고 ‘향현사유허비(鄕賢祠遺墟碑)’, ‘수근동유허비(修根洞遺墟碑)’ 등이 있다. 이들 유허비를 통해 촌락 형성 장소와 촌락의 주도 세력, 역사 유물의 위치를 알 수 있다.
[묘비]
묘비는 중국의 진한시대 이래 사자(死者)의 이름, 가계, 행적 등을 돌에 새겨 묘역에 세운 비를 말한다. 대표적인 묘비는 ‘고려중서시랑평장사상주국문경공고조기묘비(高麗中書侍郞平章事上柱國文敬公高兆基墓碑)’와 ‘행수내의녀김만덕지묘(行首內醫女金萬德之墓)’가 있다.
[마애명]
마애명은 자연 상태의 바위나 벼랑의 평평한 면에 새겨진 글자를 말한다. 이러한 마애명은 내용이나 서체, 필법, 도법(刀法)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제주 수령들의 행적과 인품을 살필 수 있으며, 유실된 향토사의 해석에도 도움이 된다.
마애명에 등장하는 이름들은 대부분 제주목사이다. 제주도 마애명에는 제명(題名: 바위, 골짜기, 시내, 언덕 등에 고상한 이름을 붙여 새김)과 제영(題詠: 주변 경관을 시로 읊어 새김)이 대부분 나타나고 있다.
경승지인 방선문[영구], 용연, 산방산, 한라산 정상에 마애명이 남아 있다. 암벽에 새겨진 마애명에는 이름만 적어놓은 것, 한시를 적어놓은 것, 절부암과 같이 사연이 담겨 있는 것, 지역의 경계를 표시한 것 등 여러 종류의 음각이 있다.
제주의 역사 유적지인 오현단에는 ‘증주벽립(曾朱壁立)’이라는 마애명이 남아 있다. 이것은 제주목사 채동건의 재임시 제주판관 홍경섭이 1856년 귤림서원 서쪽 벼랑, 속칭 병풍 바위에 새겨놓은 글자이다. 증자와 주자가 벽에 서 있는 듯이 존경하고 따르라는 의미이다.
하천 계곡이 발달한 방선문에도 ‘방선문(訪仙門: 신선이 살고 있는 누각의 대문)’, ‘환선대(喚仙臺: 방선문 안쪽에 있는 제주목사 김영수의 친필로, 방선문을 들어섰는데 신선을 만나지 못하니 불러볼 수밖에 없다는 의미) 등의 마애명이 남아 있다.
한라산 동쪽 암벽에는 ‘은피하토심공낙수이순무어사래휼 갑인춘(恩披遐土沈公樂洙以巡撫御使來恤 甲寅春: 임금님 은혜가 먼 곳까지 미치어 심락수가 순무어사로 와서 백성들을 어루만져 주었다. 갑인년 봄)이라는 마애명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