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114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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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1909年濟州義兵 |
영어음역 | 1909nyeon Jeju Uibyeong |
영어의미역 | Jeju Righteous Army in 1909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동전 |
성격 |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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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연도/일시 | 1909년 2월 25일 |
종결연도/일시 | 1909년 8월 |
발생(시작)장소 | 제주군 중면 이도리 광양동 조병생의 집 |
관련인물/단체 | 고승천|이중심|김석명 |
[정의]
1909년 3월 3일 제주도에서 의병장 고승천과 이중심의 주도하에 전개하려던 항일 의병 운동.
[개설]
의병이란 국가가 외침을 받아 위급할 때 조정의 명령이나 징발을 기다리지 않고 백성 스스로가 일어나 조직하는 일종의 민군(民軍)을 말한다. 의병 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임진왜란과 한말이라 할 수 있다.
한말의 의병은 1894년의 청일 전쟁과 갑오개혁을 통하여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던 1894~1896년의 제1차 의병 전쟁과 1904년 러일 전쟁으로 일제가 우리나라에 대한 군사적 지배권을 장악하려던 1905년~1910년의 제2차 의병 전쟁으로 구분된다.
1909년 제주 의병은 제2차 의병 전쟁 시기에 해당한다. 1909년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의병의 전투가 1,738회나 있었으며 그 중 547회가 전라남도에서 전개되었으니 제2차 의병 전쟁은 전라남도에서 가장 강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1909년 제주 지역에서 일어난 의병도 이러한 전라남도의 상황에 일정 부분 고무 받아 전개된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 배경]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계기로 일본은 1906년부터 통감부에 의한 정치를 본격적으로 실시하면서 조선의 주권을 사실상 강탈해 나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본은 제주도의 행정을 개편하여 목사를 없애고 제주군·대정군·정의군의 3군제를 실시하였다.
면리에 존재하던 전통적인 직제인 풍헌·약정·존위·경면장 등의 제도를 없애고 면장과 이장을 신설하였으며 전국적으로 의병 운동이 확산되자 제주 지역에 목포 경찰서 순사 분파소(巡査分派所)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1907년에는 제주에 관세서(管稅署)를 설치하였으며 동년 7월 31일 군대 해산 조치가 이루어지자 동년 가을 일본은 육군 부위 수도반차(手島半次)를 파견하여 3군의 군기고 및 초소를 모두 불태워버렸다.
1908년 제주에 설치되었던 순사 분파소를 제주 경찰서로 승격시키고 일본인 청수중만(淸水重滿)을 서장으로 임명한데 이어 도내 15곳에 주재소 및 출장소를 설치하여 경찰 병력을 증강시켰다.
또한 제주구재판소 판사에 일본인 다하곡웅쌍(多賀谷熊雙)을 임명함으로써 제주의 재정·치안·재판권을 사실상 강탈하기에 이르렀으며 산천단에서 해마다 거행되던 한라산신제를 혁파해 버리자 도민들의 감정은 극도로 고조되었다.
[목적]
제주 지역의 백성을 규합하여 일본인을 처단함으로써 조선의 옛 법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발단]
1907년 9월 전라남도 지역에서는 호남 창의 맹소가 기삼연의 주도하에 조직되어 의병 활동을 전개하다 1908년 2월 기삼연이 사형당하자 각기 독립적인 부대를 이끌고 의병 운동을 전개해 나가고 있었다.
1908년 7월 고승천은 당시 제주 군수인 윤원구에게서 제주도가 일본인의 손에 들어간다는 소문을 전해 들으면서 의병을 일으킬 뜻을 지니기 시작하였다. 이에 고승천은 전라남도 지역의 의병장들과 긴밀히 연락을 취하면서 비밀리에 제주 지역에서의 의병을 계획하였다.
[경과]
고승천은 김석명·노상옥 등과 더불어 제주군 중면 이도리 광양동에 대장간을 차려 놓고 무기를 제조하였으며 황사평에서는 비밀리에 훈련을 추진시키는 한편, 재정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고승천은 더 많은 동지를 규합하기 위하여 제주군 중면 이도리 광양동에 거주하는 김석조, 제주성 서문 밖에 거주하는 훈장 고성모, 오라리 훈장 고성찬에게 의병의 발동자로 참여해 줄 것을 권유하였으나 거절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승천은 의병의 거사를 더 이상 늦출 수 없다고 생각하고 1909년 2월 25일 제주군 중면 이도리 광양동 조병생의 집에서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구체적인 회합을 도모하였다. 당시 제주 의병의 창의자는 제주군 중면 이도리 광양동에 거주하는 고승천 외 8명과 제주군 신우면 어음리에 거주하는 한영근 등 총 10명이었다.
회합에서 창의자들은 거사일을 1909년 3월 3일, 거사 장소를 관덕정으로 결정하고 의병장에 고승천과 이중심을 추대하였다. 창의소는 회합을 가졌던 조병생의 집으로 생각된다.
창의 당일 고승천·김만석·김재돌·양남석·조병생 등은 대정군으로 가서 모병을 시작하고, 김석명·양만평·이중심·한영근 등은 의병을 모았다가 고승천이 거사하는 것을 기다려 가담할 것을 약속하였다.
1909년 2월 25일 창의와 함께 고승천·이중심·김석명 등 3인은 다음과 같은 격문을 작성하여 동일 오시에 발통하였다. 격문에는 먼저 의병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대의명분을 밝혔다.
다음으로 왜적의 무리가 우리의 강토를 짓밟고 있는 지금, 각 지역에서 국권 수호를 위하여 총궐기하였으니 우리 제주도민도 죽음으로써 왜적을 격퇴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또한, 구체적인 행동 내용을 담은 「통고사(通告事)」를 동쪽의 화북으로부터 남쪽, 서쪽, 북쪽 순으로 마지막 용담에 이르기까지 제주도를 순회토록 하였다.
의병의 모병은 만인을 목표로 하고 있었으며 불참 이장의 사형, 선박의 출입 금지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였다. 회의 시 선포한다는 조항은 아마 일제의 침략으로 잘못된 열 가지 조항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항의 주요 내용은 전통적 윤리 질서의 훼손, 산천단 제사의 철폐, 농토·산림·해저 측량과 세금에 대한 것이 대부분으로 당시 일제의 경제적 침략에 대한 제주도민의 항일 감정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1909년 3월 1일 창의를 미리 눈치 챈 일본 경찰에 의하여 고승천과 김만석이 체포되었으나 3월 2일 밤 창의자 양만평과 노상옥은 제주군 신우면 어음리에서 이장을 협박하여 3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어도리에서도 30여 명을 규합하였다. 그러나 귀덕리에서의 모병이 실패하자 창의의 성공이 여의치 않음을 느낀 양만평과 노상옥은 나머지 의병들을 모두 해산시키고 도주하였다.
[결과]
1909년 제주 의병은 모병 단계에서 의병장 고승천이 체포됨에 따라 실패로 끝나고 말았으며 경찰의 진압 결과 의병 운동의 창의자 다수와 모병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였던 도민들이 피해를 입었다.
고승천과 김만석은 3월 4일 경찰에 의해 총살당하였다. 경찰의 조사에 따르면 이중심은 육지로 피신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격문 및 교정 조목 집필에 관여하였던 김석명은 3월 4일 광양에서 체포되었다.
한영근은 3월 8일 체포되었으나 일자무식으로 횡설수설하여 경찰이 취조하지 못하였으며 창의자 김재돌에 대한 조사 내용 및 처리 결과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는 실정이다.
김재형은 제주군 구우면 두모리 이장으로 창의에 호응하여 두모리민을 모아 출병의 뜻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고승천의 체포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제통장기(諸統將記)」, 「통수기(統首記)」, 「보고문(報告文)」 등의 서류를 지니고 있다가 3월 8일 경찰에 발각되어 1909년 4월 2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내란죄로 3년형을 언도 받았다.
노상옥·조병생·양만평·양남석 등은 모두 피신하여 1909년 3월 9일 현재 행방을 알 수 없는 것으로 조사되어 있다. 특히, 조병생은 힘이 세어 혼자서 6명을 당할 만한 장사였는데, 광청리에서 순사 강원호가 체포하려 하자 6척이나 되는 높은 곳을 뛰어넘어 피신하였다.
1909년 4월 2일 김석명은 내란죄로 광주 지방 법원에서 10년형을 언도 받았으나 공소를 제기하여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언도 받았다. 그러나 김석명의 석방은 홍종시 등이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로 보인다.
고후삼·김재형·부우기·한영갑 등은 창의자는 아니었지만 창의에 호응하여 모병을 준비하다 발각되어 조사를 받은 사람들이다. 고후삼은 대정군 영락리 거주자로 전 순사이며 일진회 회원이었다.
고후삼은 고승천의 모병 시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으며 고승천이 체포되자 피신하여 정의군 좌면 시흥리에 피신해 있다가 1909년 8월 하순경 체포되었으나 제주 경찰서에서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석방되었다.
제주군 신좌면 대흘리 이장 부우기는 의병에 참여할 주민 20여 명을 규합한 것으로 조사를 받았으나 그 이후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한영갑은 창의자 한영근의 동생이며 제주군 신우면 어음리에 거주하던 하인으로 모병에 적극 참여하였으나 일자무식한 관계로 경찰에서 취조가 불가능하였다.
[의의와 평가]
1909년 제주 의병은 첫째, 일본인의 침략에 대한 도민의 주체적 대응이었으며 교정 조목의 상당수가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대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생존권 투쟁이기도 하였다.
둘째, 당시 의병 운동이 가장 강렬하게 전개되고 있던 전라남도 의병장들과의 교류를 통해 섬이라는 지역 단위 운동의 한계성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셋째, 창의자들의 계급적 성격을 볼 때 제주 향촌 사회에서 나름대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양반 유생들뿐만 아니라 리(里)의 하인들을 포함함으로써 일본의 침략이라는 민족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 계급적 이해관계를 초월하고 있다.
넷째, 제주도민들에게 항일 의식을 더욱 고취시키는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이후 제주인들이 적극적인 항일 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기반을 형성하였다는 점에서 1909년 제주 의병은 제주 항일 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