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108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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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豊基秦氏 |
영어음역 | Punggi Jinssi |
영어의미역 | Punggi Jin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집필자 | 김동전 |
[정의]
진필명을 시조로 하고 진계백을 입도조로 하는 제주의 세거 성씨.
[연원]
풍기진씨의 시조 진필명(秦弼明)은 원래 당나라 태원(太原) 사람으로 당 고종 때 병부시랑으로서 소정방과 함께 당군(唐軍)을 이끌고 백제 정략에 참가했다가 백제를 멸한 뒤에도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신라에 남아 정착한 것으로 전한다. 우리나라의 진씨는 모두 진필명(秦弼明)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하므로 우리나라 진씨의 도시조는 진필명(秦弼明)이다.
[입향경위]
진계백(秦季伯)은 입국 시조 진필명(秦弼明)의 18세손이며 중시조 진원(秦元)의 3세손이다. 벼슬이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렀으나 권신(權臣) 홍륜(洪倫)·최만생(崔萬生) 등과 의견이 맞지 않아 화가 미칠 것을 미리 알고 1371년(공민왕 20)에 가족과 노비 등을 이끌고 제주목 애월리에 피난 입도하였다.
[현황]
귀성(貴姓)인 진씨는 청주좌씨와 더불어 제주도에 많은 인구를 가진 귀화 씨족이다. 제주를 거점으로 그 혈통을 이어온 진씨는 관계(官界)에 진출한 두드러진 흔적이 없어 타 가문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입도조 진계백(秦季伯)이 고려 말의 혼란기에 살면서 골육상잔과 모함으로 여념이 없는 정치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낙향을 결심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이 후손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나 한다.
제주에 사는 진씨는 1950년 말까지 본관을 진주(晋州)로 통일하여 오다가 각 파간의 후손들이 본관의 근원을 확인하여 보자는 취지하에 조사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여 제주지방법원에 본관에 대한 호적 정정 신청서를 제출하였으며 1960년 5월 27일자로 적격 판결이 내려져 장파(長派: 판포)의 일부와 말파(末派: 납읍)인 진의한(秦義漢)의 후손들이 본관 진주(晋州)를 풍기(豊基)로 정정하기에 이르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런 관계로 옛 본관인 진주를 고수하고 있는 쪽은 중파(仲派: 명월)인 진인한(秦仁漢)의 후손들이다.
그런데 장파(長派: 판포)에 속하는 일부 후손들이 진씨가 우리나라에 귀화하기 전 중국에서의 근본이 대원(大元)이었다는 역사적인 고증을 들어 본관을 대원으로 하여야 한다고 주장, 제주지방법원에 본관에 대한 호적 정정 허가 신청을 내고 1968년 9월 26일자로 “풍기를 대원으로 변경함을 허가한다”는 내용의 결정 판결을 받기에 이르렀다.
본관이 대원임을 주장하는 후손들은 『진주진씨족보』 서문의 말미에 “박종혁중형수진씨세계중왈시본옹천야 시조봉대원군휘정목시조 일백이십세 시봉 조선진주군운운(朴宗赫仲兄嫂秦氏世系中曰始本雍川也 始祖封大元君諱晶目始祖 一百二十世 始封 朝鮮晋州君云云)”이라는 구절과, 진필명(秦弼明)으로부터 15세가 되는 진질직(秦礩直)·진질황(秦礩晃)·진질명(秦礩溟) 등 형제 중 진질명(秦礩溟)이 풍기부원군으로 봉하게 됨에 따라 그때부터 풍기를 본관으로 정하여 쓰게 되었다는 내용의 기록을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