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107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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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夜學運動 |
영어음역 | Yahak Undong |
영어의미역 | Night School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강만익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 지역에서 일제 강점기 때 마을 향사에 모여 한글과 산수 등을 익혔던 문맹 퇴치 운동.
[개설]
야학 운동은 일제하 식민지 제도 교육으로부터 배제된 민중들의 의식화를 위한 민중 교육 가운데 가장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던 운동이다.
[역사적 배경]
제주도의 야학 운동은 3·1 운동 이후 제주 지역 청년들이 계몽 운동 차원에서 노동 야학을 개설, 교사로 참여하여 대중 계몽을 벌임으로써 시작되었다. 1920년대의 야학 운동은 진보적인 의식을 가진 청년들이 담당했으며, 후반기에 가서는 사회주의적 색채가 농후해진다.
본격적인 제주 지역의 야학 운동은 192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실시되었다. 1922년에 구좌면 김녕리에 김녕 청년회가 설립한 연경 야학회가 있었고, 1925년 함덕리의 협성 청년회가 설립한 노동 야학회와 함께 같은 해 구좌읍 상도리 청년회가 설립한 상도 야학회가 있었다.
이러한 야학 운동들은 문맹 퇴치를 기조로 민족 교육을 전개하였다. 실례로, 성산면 온평리 야학은 청년들이 야학 교사를 하며 민족 정신과 한글을 가르쳤으며, 연례적으로 연극을 통해 계몽 활동을 벌였다.
[목적]
제주도 야학 운동의 강사는 신진 청년들로서 민족 의식이 강했다. 더욱이 1930년 초에 이르러 일본의 노동 현장에서 돌아온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민족 교육, 항일 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야학 운동을 펼쳤다. 구좌면 동부 지구의 하도(下道), 종달, 우도(牛島)의 야학 활동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경과]
이러한 항일 민족 운동으로 인해 1934년 애월읍 하귀리 야학 강사 세 명이 체포되어 징역형을, 또 동년 서귀포의 야학 활동 강사 세 명이 징역형을 언도받기도 했다. 특히 1931~1932년 구좌읍 일대의 해녀 항일 운동은 그 배후에 야학 운동이 있었기 때문에 일제 당국은 구좌읍 지역의 야학에 대한 단속을 강화시켰으며, 심지어 인근 공립 보통학교에서 야학 운동을 감시하기도 했다.
제주도 야학 운동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제주 청년들이 계몽의 의도를 가지고 야학의 강사가 되었고, 야학 활동을 통해 제주 해녀들의 신뢰를 얻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야학 운동은 일본의 침탈에 대한 제주 해녀의 투쟁 과정에서 이를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또한 각 마을 단위로 조직되었던 각종 소년 단체와 청년 단체들이 야학을 중심으로 민족 정신 앙양과 반일 투쟁을 도모하였다.
[결과]
야학 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이 일제 당국에 검거되면 야학도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일례로 1928년에 설립된 북촌 부녀 야학은 조성환, 부기순, 부병준 등이 교사로 활동을 하였다.
부병준은 북촌 부녀 야학을 기반으로 1932년 2월 신좌[조천] 적색 농민 조합 준비 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1930년대 제주도 민족 해방 운동의 세력화를 도모하려던 여운형 계열의 민족주의자로, 1934년 10월 일제에 의한 대규모 검거 선풍으로 입건, 기소됨에 따라 결국은 북촌부녀 야학까지도 침체 국면에 빠져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