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106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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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濟州缸坡頭里抗蒙遺跡 |
영어음역 | Jeju Hangpaduri Hangmong Yujeok |
영어의미역 | Anti-Mongol Historic Site in Hangpadu-ri, Jej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 1126-1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김동전 |
문화재 지정 일시 | 1997년 4월 18일 - 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 사적 제396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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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 사적 재지정 |
성격 | 사적지 |
건립시기/연도 | 고려 시대 |
관련인물 | 김통정 |
면적 | 1.135476㎢ |
소재지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 1126-1 |
소유자 | 국유 |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에 있는 삼별초가 최후까지 대몽항쟁을 벌인 유적지.
[개설]
13세기에 고려를 침략한 몽고군에 저항하여 싸운 삼별초의 최후의 항쟁지이다. 1271년(원종 12) 5월 삼별초를 이끌고 제주도에 들어온 김통정 장군은 이곳에 내·외성으로 된 항파두성을 축조했다. 외성은 길이가 15㎞에 이르는 토성이었고, 내성은 둘레 800m의 석성이었다.
이 성을 본거로 삼별초는 2년여에 걸쳐 내륙 지방에 주둔한 여원 연합군을 공격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삼별초 회유에 실패한 여원 연합군은 드디어 1272년 11월 1만여 대군을 이끌고 함덕포로 상륙하여, 함덕포, 파군봉, 항파두리, 붉은오름 등 여러 곳에서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이때부터 제주도는 몽고의 직속령이 되어 100년에 걸친 수난기를 맞는다.
[건립경위]
고려 조정이 몽고군과 강화를 맺고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하자 이에 맞서 여몽 연합군에 최후까지 항쟁했던 삼별초의 마지막 요새였다. 삼별초는 고려와 몽골과의 연합을 규탄하면서 승화후(丞化侯) 왕온(王溫)을 왕으로 삼고 1270년 강화에서 반란을 일으켜서 1,000여 척의 배에 병기와 식량을 싣고 그 해 8월에 전라남도 진도에 용장성을 터전으로 해상 왕국을 건설하였다.
삼별초가 제주도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1270년(원종 11) 10월경으로 보인다. 이 무렵 고려 조정에서도 삼별초가 제주에 들어올 것을 막기 위해 영암부사 김수와 고여림 장군을 제주로 보내어 방어케 했다.
삼별초의 장수 이문경이 명월포로 상륙하여 제주의 동제원에 진을 치고 김수, 고여림 장군 등 고려 관군과 송담천에서 싸워 승리를 하였다. 그 후 1271년(원종 12) 5월 15일에 진도가 여몽 연합군에 함락되자, 삼별초의 김통정 장군은 남은 군사를 이끌고 제주에 왔다. 또한 남해현을 점거했던 삼별초의 장수 유존혁도 함께 들어왔다.
삼별초는 제주도에 들어와 방어 시설을 착수했다. 『고려사』에서 1272년(원종 13) 6월 29일에 “적(삼별초)은 이미 제주도에 들어가 내·외성을 쌓았는데, 그 험고함을 믿고 날로 더욱 창궐하여 항상 나와서 노략질하니, 연해 지방의 소연하였다”고 기록한 것처럼, 성곽을 견고하게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김방경과 몽고의 혼도가 이끄는 여몽 연합군이 김통정 장군을 비롯한 삼별초군을 함락시키면서 1273년(원종 14)에 삼별초의 항쟁이 끝이 났다.
삼별초가 제주도에 쌓았던 내·외성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기록에 의하면, 고토성, 고장성, 항파두리고성, 애월목성 등으로 보인다. 고(古)자는 예 성이란 의미에서 후대에 붙인 것이다.
내성은 ‘재성’, 혹은 ‘궁성’이라고도 하는데, 왕궁과 관아 시설 주위를 둘러쌓은 성이다. 또한 외성이란 나성이라고도 하는데, 도시 전체를 둘러싼 성을 말한다. 그중 내성에 해당되는 것이 항파두리고성이다.
성의 규모는 둘레 700m 정도이며, 장방형의 석성으로 보이고, 건물이 있었던 성 안에는 각종 기와 조각과 가공된 석재가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또한 성 안에는 샘이 있어서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특히 ‘고내촌 신축 2년’이라고 명문된 기와 조각이 발견되었다. 즉 신축 2년인 1241년(고종 28)에 고내촌에서 제작된 기와가 삼별초의 관아 시설에 사용했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외성으로는 총 길이 6㎞에 걸친 토성(높이 5m, 폭 3~4m)이 대표적이다. 이 토성은 해안과 2.6㎞ 정도 떨어진 내륙에 남쪽은 높고, 북쪽 낮은 자연 지형을 갖추고 있다. 토성의 동쪽에는 고성천, 서쪽에는 소앵천이 위치하고 있다. 토성은 주변의 자갈이 함유된 황갈색 토질을 토대로 하여 토층과 석괴층을 교대로 하여 축조하였다.
더욱이 이 토성 위에는 항상 나무를 태운 재를 뿌려놓았다가 적이 침공할 때 연막전술을 폈다고 한다. 즉 말 꼬리에 큰 비를 매달아 달리게 함으로써 자연히 재가 하늘로 날아올라 연막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외성의 면적은 약 79만 3000㎡에 달한다고 하며, 동서남북에 문이 있고 성 안에는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지형적으로 볼 때, 주위가 하천과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고 바다가 보이는 천연적인 요새지이다.
고장성은 속칭 환해장성이다. “바닷가를 따라 둘러쌓았는데, 둘레가 120여㎞이다. 고려 원종 때에 삼별초가 진도에 웅거할 때, 고려 조정이 고여림 등을 제주에 보내어 이 성을 쌓았다”고 하였다.
이때를 시점으로 하여 그들이 전사한 뒤에도 삼별초군이 계속하여 쌓은 것이 아니고 바다로부터 적이 상륙하기 쉬운 곳에만 방어의 목적으로 쌓은 것일 것이다. 따라서 실제로는 120㎞가 안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애월목성이 있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형태]
주요 유적에 김통정의 전설이 얽힌 곳으로서, 김통정이 토성 위에서 뛰어내린 발자국에 바위가 파였고 그곳에서 샘이 솟아나게 되었다는 ‘장수물’이 있는데, ‘장수발자국’이라고도 하며, 여기서 나오는 물은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약수로 알려져 있다. 또 삼별초 군사들이 과녘으로 사용했다는 ‘살 맞은 돌’을 비롯해 고려 고분, 돌쩌귀, 구시물, 옹성물, 연못지, 파군봉 등이 있다.
성의 동쪽에 고성천이라는 건천이, 서쪽에 소앵천이라는 건천이 있다. 남고북저의 지형으로 북쪽은 토성 부근이 급격한 경사를 이루며, 동쪽은 완만하나 서쪽에는 단애를 이루는 하천이 있어 성을 쌓기에 천연적으로 적합한 지형이다.
이러한 지형을 이용한 결과, 남동과 북서쪽으로 가장 긴 쪽이 약 1,458m이고 남서와 북동쪽으로는 가장 짧은 쪽이 664m로 평면이 타원형을 이룬다. 북쪽에는 잘 발달된 용천수가 형성되어 있는데 당시 이를 보호하기 위해 보조 외성을 쌓았다.
전체적인 토질은 토성을 쌓기에 적합한 토양이라고 할 수 있는, 찰기가 아주 강하고 자갈이 약간 함유된 황갈색 토양으로 이루어졌다. 성의 북쪽에서 토성과 같은 시기의 것으로 보이는 와요가 발견되었다.
[현황]
항파두리에는 1977년 ‘항몽순의비(抗蒙殉義碑)’가 세워졌고 전시관, 관리 이용 시설과 함께 토성 보수 공사가 이루어졌다. 그동안 북제주군 애월읍 고성리와 상귀리 일대가 1976년 9월 9일 제주도 문화재(기념물)로 지정된 이후 지속적인 정비 사업을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토성이 복원되고, 순의비, 순의문, 전시관과 관리 사무소가 정비되어 국난 극복의 교육 도장으로 활용하다가 1997년 4월 18일에 국가지정 문화재인 사적으로 변경, 지정되면서 정비 사업이 활기를 띠고 있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