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25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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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國土-象徵漢拏山天然保護區域 |
영어의미역 | The Highesh Mountain of South Korea |
분야 | 지리/자연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집필자 | 강문규 |
[개설]
한라산[1,950m]은 남한 최고봉으로 백두산과 더불어 국토를 잇는 상징적인 산이다.
한라산은 예부터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산으로 백록을 탄 신선이 사는 영산이라 알려져 왔고, 불로초를 찾아 영주산을 찾았다는 서불의 전설이 깃들어 있다. 또한 한라산의 여신 설문대할망이 솥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 제주인의 풍부한 상상력과 영감의 보고이다.
또한 한라산은 세계 최대의 기생 화산을 거느린 산으로 360여 개의 자화산을 거느리고 있다. 그 기슭에는 2,000종에 이르는 한대·온대·아열대 식물과 3,000여 종의 곤충과 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지질·생태·경관적 가치로 인해 2003년에는 유네스코에 의해 생물권 보존 핵심 지역으로 지정되었을 만큼 생태적 가치가 높은 산이기도 하다. 한라산 천연보호구역은 1966년 10월 12일 천연기념물 제182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천연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사라져버린 한라산 최고봉, 혈망봉]
흔히 백록담이 한라산의 최고봉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으나 백록담은 한라산의 최고봉이 아니다. 천지(天池)가 백두산의 최고 지점이 아니듯이 백록담도 그렇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종종 백록담을 한라산 정상인 것처럼 표현한다. 이는 정상을 일컫는 마땅한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왜 한라산에는 최고봉 이름이 불려지지 않는 것일까. 우선 지형적으로 볼 때 한라산 정상이라고 딱히 부를 만한 높은 봉우리가 없다. 한라산은 부악(釜岳) 또는 두무악(頭無岳)이라고도 부른다. 정상부가 마치 솥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두무악 역시 머리가 없는 산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이는 한라산 정상부의 형태를 잘 묘사하고 있다.
백록담을 둘러싸고 있는 분화구 외륜부는 성곽처럼 보이는데, 동서면은 높고 남북면은 상대적으로 낮다. 전체적으로 남서 사면이 가장 높지만 얼핏 보면 솥처럼 기복이 커 보이지 않는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가장 높은 지점이 어디라고 하기가 애매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옛 선인들은 한라산 정상을 말할 때 흔히 ‘상봉(上峰)’ 또는 ‘절정(絶頂)’이라고 섞어 불렀다.
최초의 한라산 등반기를 남긴 임제(林悌)의 『남명소승(南溟小乘)』에는 “절정(絶頂)에 도달하였다. 구덩이같이 함몰되어 못(백록담)이 되었고, 돌사닥다리로 둘러싸여”라고 기록되어 있는가 하면, “상봉(上峰)을 따라 두타사(頭陀寺)로 내려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한라산 최고봉을 부르는 이름은 전혀 없었는가. 고문헌을 뒤적이다 보면 한라산 최고봉에 관한 기록이 간헐적으로 보인다. 1609년 제주판관으로 부임한 뒤 한라산을 올랐던 김치(金緻)의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를 보면 “한낮이 되어서야 비로소 정상 위에 도착하여 혈망봉(穴望峰)을 마주하고 앉았다. 봉우리에는 한 개 분화구가 있어 전체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름이 붙은 것이다.”라는 기사가 보인다.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혈망봉은 최고봉인 특정 지점의 봉우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분화구 주변을 설명하는 표현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1841년 3월부터 1843년 6월까지 제주목사를 지냈던 이원조(李源祚)의 『탐라지(耽羅誌)』를 보면 혈망봉이 분화구 전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한라산 최고 지점 일대를 뜻하는 봉우리임을 밝히고 있어 주목된다. “혈망봉=백록담 남쪽 변두리에 있는 봉우리에 한 구멍이 뚫려 있는데 사방을 다 둘러 볼 수 있다. 조금 동쪽에는 또 방암이 있는데 그 모양은 네모나 있고 마치 사람이 쪼아서 만든 것 같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혈망봉이 백록담이 아니라 특정 지점의 봉우리임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1800년대 말엽 남만리(南萬里)가 지은 『탐라지(耽羅誌)』에도 동일한 내용이 수록돼 있다. 1954년 9월에 펴낸 『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의 기록은 혈망봉이 한라산의 최고 지점을 뜻하는 이름임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다. “혈망봉=한라산 절정(絶頂)에 재(在)하다. 사방을 가히 통망(通望)할 수 있다. 동쪽에는 방암(方巖)이 있다. 그 형(形)이 방정(方正)하여 사람이 쪼아 만든 것 같다.”고 표현하고 있다. 한라산의 가장 높은 곳이 혈망봉임을 거듭 밝히고 있는 것이다.
고지도상에 혈망봉을 그려 넣은 지도는 드물다. 그러나 1702년(숙종 28) 이형상 제주목사가 화공을 시켜 그린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에는 한라산 정상부에 백록담과 함께 ‘혈망봉(穴望峰)’을 뚜렷하게 표기하고 있다. 당시에 산 정상을 혈망봉으로 불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 자료는 빈번하게 인용되어 온 것은 아니지만 한라산 최고봉을 일컫는 이름이 있었음을 반증하는 기록들이다.
그러면 ‘혈망봉’이라는 이름은 왜 지금까지 일반인들에게 전해지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혈망봉으로 불려졌던 “구멍이 뚫린, 그래서 사방을 다 둘러 볼 수 있는 봉우리”의 존재 유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최고 지점인 절정에서 20~30m 정도 떨어진 남서쪽에는 마치 거대한 장검(長劍)을 세운 듯한 바위들이 산체의 외륜을 감싸고 있다. 풍화 작용에 의해 깎이고 무너지며 이루어진 형태이다. 이들 거대 바위 중 옛날에는 윗덮개가 있어 구멍처럼 보였던, 그러나 지금은 무너져 버린 ‘혈망봉’ 바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항상 변하는 백록담의 깊이]
백록담은 한라산의 신비감을 더하게 하는 대상이다. 그래서 한라산을 찾는 이들은 백록담을 보는 것으로 등반의 의미를 찾기도 했다. 백록담이 고갈되고 있다거나 담수화를 위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데는 백록담에 대한 외경심이 깃들어 있다.
백록담에 관한 기록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1578년 백호가 제주의 경승을 둘러본 뒤 남긴 『남명소승』에는 “한라산 절정에 이르니 구덩이와 같이 함몰되어 못이 되었고, 둘레가 7~8리 가량 되었다. 아래(백록담)를 굽어보니 물은 유리와 같고 깊이는 측량할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1601년 안무어사로 제주에 내려 온 김상헌의 『남사록(南槎錄)』에는 “정상은 함몰되어 꼭 솥과 같다. 사면에는 향그러운 넝쿨풀로 뒤덮여 있는데, 가운데에 두 개의 못이 있다. 얕은 곳은 종아리가 빠지고 깊은 곳은 무릎까지 빠진다.”고 했다. 1609년 제주판관으로 내려 온 김치의 기록은 “사면의 봉우리가 성곽과 같이 빙 둘리어져 있고, 가운데에 못이 하나 있는데, 깊이가 한길 남짓(2m 정도)이다.”라고 했다.
300여 년 전인 1702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형상은 『남환박물(南宦博物)』에서 “둘레는 10여 리나 되고, 깊이는 800척이나 되는데, 그 밑에는 백록담이다. 원경의 둘레는 400 보(步)이고, 수심은 수장(수 미터)에 불과하다. 지지에 깊이를 알 수 없다고 한 것은 잘못 알려진 것”이라 했다.
1841년 제주목사로 왔던 이원조는 『탐라록(耽羅錄)』에서 “백록담의 깊이를 헤아리면 장(1장은 10척으로 약 2m)이 되지만, 물이 겨우 정강이를 적시는 얕은 경우가 전체 바닥의 5분의 1 정도”라고 하여 수심과 못의 둘레를 어느 정도 추정케 하고 있다.
또 1873년 제주에 귀양 왔다가 1875년 2월에 방면되자 한라산을 올랐던 최익현은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에서 “정상에 이르러 갑자기 가운데가 함몰된 곳이 있으니 이른바 백록담이었다. 얕은 곳은 무릎까지, 깊은 곳은 허리까지 찼다.”고 했다.
지금부터 100여 년 전인 1901년 5월 한라산을 오른 독일인 지리학자인 지그프리드 겐테의 기록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그는 서양인으로는 최초로 한라산을 올랐고, 한라산의 높이를 1,950m라고 처음 측정한 지리학자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의 기록에는 “나는 지름이 약 400m인 의외로 작은 분화구가 약 70m 높이의 가파른 벽들로 둘러싸여 있음을 알아냈다. 바닥에는 겨울눈에 다 덮이지 않고 남겨진, 큼직한 웅덩이보다 약간 더 큰 작은 호수가 빛나고 있었다.”고 하였다. 겐테는 백록담을 ‘큼직한 물웅덩이보다 약간 더 큰 작은 호수’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인 1937년 등정했던 이은상은 『탐라기행』에서 “백록담은 정상 움푹 패인 곳에 크고 작은 두 개로 되어 있다.”고 했다.
이처럼 백록담에 관한 기록은 1500년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연대별로 남아 있다. 이들 내용을 정리하면 못의 깊이는 얕은 곳은 정강이에서 무릎 정도며 깊은 곳은 허리에 차는데, 일부의 기록은 한길(약 2m), 또는 수장(수 미터)이나 된다는 표현도 있다.
또 못의 형태를 보면 400년 전 김상헌의 기록과 일제강점기 이은상의 기록은 두 개로 형성되어 있다고 하고 있다. 이에 비해 나머지 일곱 사람의 글에는 이런 표현이 없어 겐테의 기록처럼 백록담은 ‘웅덩이보다 약간 더 큰 작은 호수’ 형태를 보인 날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처럼 500년 전의 기록에서 최근 60여 년 전까지의 기록을 놓고 보면 백록담 원형의 모습은 지금과 크게 다를 바 없으나, 담수량은 역시 예전보다 적어지고 있다고 여겨진다. 하나의 호수 형태보다 두 개의 물웅덩이와 같은 현상이 자주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1960년대 이후 등반객이 크게 늘어나 답압(踏壓)에 의한 백록담 경사면의 붕괴가 가속화되면서 ‘백록담의 물그릇’이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라일보 한라산학술탐사단과 한라산연구소는 대한지적공사[현 한국국토정보공사] 제주지사, 한국농촌공사 제주도본부 관계자들과 2003년 7월 24일부터 이틀간 백록담 담수 조사를 실시했다. 당시 한라산 정상 강우량은 6월 10일부터 7월 24일까지 총 44일 중 37일 동안 1,652.5㎜였다. 태풍 등의 특징적 기상 환경을 제외하고는 백록담에 가장 많은 담수를 보유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조사 결과 백록담의 만수위, 즉 집중 호우에 의해 가장 많은 양이 담수되었을 때의 최대 수위는 4.05m, 담수량은 56,500톤으로 밝혀졌다. 물론 이 조사 수치는 강우량에 의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그러나 2003년 여름 1,652.5㎜의 비가 내렸을 때 최대 만수위는 4.05m였다는 기준점을 처음으로 확보했다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얼음 창고로 사용된 구린굴]
한라산 속에는 선인들의 지혜로움을 보여주는 유적이 적지 않다. 『탐라지』에는 “빙고는 한라산 바위굴 속에 있는데 얼음은 한여름에도 녹지 않으며, 쪼개어 급용(給用)하고 다른 창고에 저장하지는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육지부의 석빙고와 달리 제주인들은 산 속에 있는 굴을 이용해 겨울에 얼음을 저장했다가 여름에 꺼내 사용했다는 뜻이다. 이런 기록은 고문헌 몇몇 곳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면 얼음을 저장했던 굴은 어디일까. 『탐라지』 기록을 볼 때 굴은 제주목 관아와 가까운 산 속에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일반 백성들이 아니라 제주목사나 관찰사 등이 거처하는 관아에 얼음을 급용하기 위한 빙고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주시가 펴낸 『제주시 일원 천연동굴 분포조사보고서』를 보면 제주목 관아가 소재했던 지금의 제주시권에 있으면서 한라산 속에 있는 굴은 700~800m의 구린굴과 해발 600m에 위치한 평굴, 두 개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현장을 보면 평굴은 외부로부터의 접근이 쉽지 않고 굴 내부로 들어가려고 할 경우 출입자가 엎드려 들어가야 한다. 사람들의 출입이 자유로운 곳도 아니고, 얼음을 저장하기에도 적당치 않은 곳이다.
반면 구린굴은 한라산에 산재한 굴 중에는 수행굴(해발 1,400m 부근) 다음으로 고지대에 있어 얼음을 캐고 저장하기에 적당한 곳이다. 더구나 구린굴은 관음사 코스에 바로 접해 있어 접근성이 용이하다. 한라일보 한라산학술대탐사팀은 지난 1998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3~4차례 구린굴을 탐사한 바 있다. 이는 ‘하천과 계곡’ 탐사의 일환으로 실시된 병문천 탐사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제주시 3대 하천의 하나인 병문천은 해발 1,530m 지점에서 발원한 뒤 세 갈래로 나누어져 내려오다 1,000m 지경에서 다시 합류하면서 본류를 형성한다. 구린굴은 이들 합류지점에서 150~200m 하류지점에 위치해 있다. 국립공원관리사무소 관음사 등반안내소에서 약 1.5㎞ 정도 올라가면 등산로 바로 서쪽에 하천이 무너지면서 일부 구간이 지하로 뻥 뚫려 있는 공간이 나타난다. 한라산국립공원에서는 등반객들의 추락 위험을 경고하는 푯말을 붙여 놓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구린굴 입구이다.
구린굴은 하천의 바닥 아래 형성돼 있다. 즉, 구린굴은 하천 바닥 바로 밑 지하에 형성돼 있는 것이다. 동굴 형태에서 볼 수 있듯이 구린굴은 동굴이 무너지며 하천으로 변하고 있는 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제주 유일의 굴이기도 하다.
구린굴 탐사 결과 총 길이는 216m, 진입로의 너비는 대략 3m를 넘지 않는다. 진입로 양쪽에는 굴을 이용하기 쉽게 누군가가 오랫동안 돌들을 양쪽 언저리로 가지런히 정리한 흔적이 나타난다. 내부도 평탄 작업을 한 것처럼 잘 정리돼 있는데, 가장 안쪽에는 높이 2~3m, 넓이 50~70여 평 정도 되는 광장이 형성돼 있다. 입구에서부터 일정한 크기로 자른 나무토막들이 깔려 있다.
구린굴이 굴빙고 역할을 했던 곳이라면 바로 구린굴 바로 위 지점에 있는 하천에서 얼음을 캔 뒤 굴 속 깊은 곳에 있는 넓은 광장에 저장했을 것이다. 평평하게 정돈된 진입로와 일정한 크기로 잘라낸 나무토막들은 얼음을 운반하기 쉽게 만들어진 도구이며 환경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왜 빙고는 사용이 지속되지 못했을까. 그것은 구린굴의 특성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굴 내부의 몇몇 곳은 2~3층으로 형성돼 있고, 지하수의 수로는 물론 2층 굴에는 작은 연못도 있다. 이 곳 역시 동굴 위인 하천에서 침투하는 누수에 의한 침식과 균열 현상이 보인다. 하천화가 진행 중에 있는 것이다.
굴 속 가장 깊은 곳, 그러니까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氷庫] 구실을 했던 곳을 보면 천장 곳곳에 균열된 틈새를 타고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굴 내부에 틈새가 생겨나는 것은 외부에서 물과 공기가 유입됨을 뜻하고, 이는 저온을 유지해야 하는 얼음 창고로서의 치명적 결함을 의미한다.
구린굴 밖으로 나와 주변을 살펴보면 선인들이 남긴 집 터와 숯 가마 터 흔적이 보인다. 얼음을 캐어 저장하고, 급용하는 일을 맡았던 사람들이 살았던 집 터는 아닐까. 숯 가마 터와 같은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숯을 구웠던 이들은 얼음을 저장·급용하는 일 외에도 틈틈이 숯을 구워 관에 공급하거나 일반인들에게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방편으로 삼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육지부와는 달리 천연의 동굴을 빙고로 활용했던 선인들의 지혜는 동굴의 하천화와 함께 막을 내리며 희미한 자취만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활활 타오르는 봉화대의 불꽃, 왕관바위]
백록담에서 관음사 코스를 따라 조금 내려오면 왕관릉 북쪽 선단부인 표고 1,660m 지점에 왕관바위가 우뚝 솟아 있다. 한라산의 가장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주는 경승의 하나로 천하를 굽어보는 것과 같은 탁 트인 조망감을 맛볼 수 있다. 서쪽으로는 장구목과 삼각봉의 우뚝한 모습이 왕관릉과 더불어 웅장한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왕관암에는 또 다른 이름이 있다. 김종철의 『오름나그네』에는 “왕관암의 옛 이름은 ‘연딧돌’로, 연디는 연대(烟臺)를 지칭하는 제주방언”이라는 기사가 보인다. 봉수와 연대는 고대로부터 이용돼 왔던 통신 수단의 하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인 1150년에 처음 제도화되고, 이후 조선시대인 1419년 더욱 체계적으로 정비된다.
제주도에도 이 무렵 모든 봉수와 연대가 새롭게 구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1439년(세종 21) 제주도안무사(濟州都安撫使) 한승순이 “봉화와 후망은 주(州)의 동쪽 김녕부터 주 서쪽 판포에 이르는 10개소와 대정현 서쪽 차귀부터 동쪽 거옥에 이르는 5개소, 정의현 서쪽에서 북쪽 지말산에 이르는 7개소에 한 봉화마다 5명을 나누어 정합니다. 또 연대(煙臺)를 쌓는데 높이와 너비가 각각 10척입니다.”라고 보고한 글이 보인다.
제주도의 봉수와 연대에 관한 고찰은 향토사학가 김봉옥의 「제주도의 방어유적」에서 다뤄지고 있다. 그런데 이 자료에는 왕관암과 연대에 관한 언급이 없다. 그러면 왕관암은 과연 연대였는가.『탐라순력도』를 보면 한라산 정상과 가까운 동북쪽 높은 언덕에 불꽃 형태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림의 위치로 볼 때 탐라계곡의 동북쪽, 그러니까 왕관릉과 비슷한 지점에 연대가 있었음을 뒷받침하는 자료이다.
그러면 제주성 내에서 반나절 넘게 걸어야 도달할 수 있는 한라산 높은 지대에 연대(또는 봉수)를 설치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라산 정상에서 북쪽으로 내달리다 우뚝 멈춰선 것처럼 보이는 왕관바위에 올라 앞을 내다보면 그 의문은 금방 풀리게 된다.
「제주도의 방어유적」에 따르면 제주에는 50여 개의 봉수와 연대가 있었다. 이들 연대와 봉수는 해안과 중산간 지대를 연결하면서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꽃으로 연락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들 봉수와 연대에서 가장 빠르게 위급함을 알려야 하는 최종 보고처가 제주목 관아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제주 자체만으로 대처하기 힘든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조정에 신속히 전달하기 위한 통신 체계가 마련돼야 한다. 배로 출항해 가는 것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이에 따라 설치된 것이 제주-추자도-남해안을 잇는 비상연락 체계였다. 추자도에는 지금도 연대가 남아 있는데, 제주에서의 비상 상황을 육지부로 전달하는 징검다리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추자도와 남해안에서 볼 때 제주에서 피워 올리는 횃불과 연기를 보려면 지대가 높은 곳에서 봉화를 올려야 한다. 낮은 곳에서 올리는 봉화는 한라산에 가려 식별하기가 어렵다. 한라산 정상 위로 연기와 불꽃이 보여야 제주의 위급한 신호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왕관암은 연대 또는 봉수대로서 최적의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왕관암에 서면 제주의 산북 지방이 한눈에 들어오고 추자도를 비롯한 남해안이 어슴푸레 다가온다. 이러한 거리감은 추자도와 남해안에서 한라산을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석양을 받으면 왕관바위는 그야말로 황금빛으로 물들어 ‘금빛 왕관’처럼 빛난다. 왕관암·왕관릉의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하지만 노을빛을 받아 황금빛 왕관처럼 빛나는 모습은 또한 활활 타오르는 봉화대의 불꽃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한라산 속의 봉수·연대가 왕관릉이 아니라 삼각봉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는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에 보이는 기사 등을 근거로 하고 있다. 1875년 지금의 관음사 등반 코스로 한라산을 올랐던 최익현은 정상으로 향하던 중 “서쪽으로 조금 나아가니 깎아지른 절벽이 수천 길이다. 이른바 삼한 때 봉수의 터라 하나 가히 증거할 수 없다.”는 글을 남겼다.
이 기록을 볼 때 수천 길에 이르는 절벽은, 지금의 등반로로 본다면 왕관릉이다. 그런데 최익현은 서쪽으로 조금 나아가니 깎아지른 절벽이 나타났다고 했다. 왕관릉은 탐라계곡의 동쪽에 있고, 서쪽은 개미목과 삼각봉으로 이어지는 방향이다.
당시 최익현은 제주의 선비들과 함께 한라산을 올랐는데 그들이 이곳을 삼한시대의 봉수 터라고 소개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탐라순력도』에 나타나는 봉수대의 위치가 어느 곳을 지시하는 지는 앞으로 더 많은 조사 연구를 통해 밝혀져야 할 내용이다.
[영실은 계곡이 아닌 분화구]
영실은 한라산 경관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곳이다. 비경만이 아니라 온갖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현장이며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유적이 산재해 있다. 영실에 관한 기록은 500년 전인 1545년 제주를 찾았던 임제가 남긴 『남명소승』이 처음이다.
임제는 과거에 급제한 뒤 제주판관으로 재임하고 있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제주에 내려오게 된다. 그는 제주에 온 뒤 섬을 한바퀴 돌며 접한 한라산을 비롯한 풍광과 산물 등을 시문으로 남겼다. 영실에 관한 기록도 한라산을 등정하기 위해 존자암에 며칠 동안 머물며 영실을 둘러 본 뒤 남긴 글이다.
영실은 한라산 백록담 서남쪽으로 선작지왓을 지나 해발 1,300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지금은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잇는 제2횡단도로를 따라가다 영실로 진입하는 도로를 통해 접근이 가능하다. 영실 주위에는 수많은 기암괴석들이 여러 형상으로 솟아 있어 장관을 이룬다.
한라산의 계곡은 어리목계곡을 제외하고는 모두 건천(乾川)이다. 그런데도 여기서는 사철 물이 흘러 청아한 물소리를 들을 수 있다. 병풍바위 부근에서 발원한 샘은 서북 방향으로 흐르다 영실을 벗어나며 남쪽으로 잠류(潛流)한다. 이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북서쪽으로는 병풍바위가 웅장한 형태를 갖추고 있고, 동남쪽으로는 기암괴석들이 능선 위에 솟아 있다.
마치 돌부처 형상을 하고 있어 천불봉(千佛峰) 또는 오백나한(五百羅漢)이라 하고, 어떤 이들은 마치 위풍당당한 장수들이 열병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오백장군(五百將軍)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처럼 영실 내부는 물이 사철 흐르는 골짜기를 따라 양쪽에 절벽과 기암괴석들이 전개되는 형태를 갖추고 있어 사람들은 이를 영실계곡이라 불러 왔다.
그러나 지난 2000년 3월 7일자 『한라일보』는 1면에 “영실은 계곡이 아닌 제주 최대 분화구”라는 기사를 보도했다. 한라산학술탐사단이 화산지질학 전공자인 부산대학교 윤성효 교수와 함께 영실지형도, 항공사진 자료를 토대로, 현장 조사를 거쳐 확인됐다는 내용과 윤성효 교수의 기고문도 실렸다.
조사 결과 영실은 장축 850m, 단축 800m 규모의 원형이며, 외륜은 현무암에 중앙은 조면암 돔을 형성하고 있는 분화구로 둘레 약 2㎞, 깊이 350m에 이른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진 것이다. 오랫동안 V자 형태의 계곡으로만 알고 있었던 영실이 둥그런 형태의 분화구라는 보도였다.
영실은 등산코스를 따라 가노라면 영락없는 계곡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것은 중앙에 우뚝 솟은 오백나한의 암벽들로 인해 그 너머의 모습, 즉 영실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생긴 착시 현상이다.
[영실에 전해지는 애달픈 설문대할망 전설]
흥미로운 것은 제주 선인들의 영실에 관한 예리한 안목과 풍부한 상상력이다. 영실에는 오백 명이나 되는 아들들을 위해 거대한 솥에 죽을 쑤다 빠져 죽은 설문대할망의 전설이 전해 온다.
옛날 어떤 부인(설문대할망: 한라산의 여신)이 아들 500명을 데리고 살았다. 식구들은 많은데 흉년이 들어서 끼니를 이어가기 어려웠다. 어느 날 어머니는 아들들에게 “어디 가서 양식을 구해 와야 죽이라도 끓여먹지 않겠느냐.”고 재촉했다. 그래서 500명 형제 모두가 양식을 구하러 집을 나섰다. 아들들이 동냥을 얻어 돌아왔다. 어머니는 아이들이 양식을 얻어 오자 다시 아이들에게 땔나무를 구해오라고 한 뒤 얻어 온 양식을 큰 솥에 넣고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500명이 먹을 죽을 끓이기 위해 그 어머니는 가마솥 주위를 돌아가며 죽을 저었다. 그러다가 잘못해서 그만 죽 끓이는 솥에 빠져 헤어나지 못했다.
그런 사연도 모른 채 나무를 하러 갔던 아들들은 배고픔을 참지 못해 죽을 퍼내 맛있게 먹었다. 그러다가 이상한 뼈다귀를 발견했다. 이상하다 생각하던 아들들은 어머니가 안 보이는 것을 알고, 그제야 사실을 알게 되었다.
먼저 그 사실을 안 막내는 하도 부끄럽고 안쓰러워서 집을 빠져 나와 서쪽으로 달려가다가 지금 한경면 고산리 앞 바다의 차귀섬에 들어가 몇 날 며칠을 울다 바위가 되었다. 집에 남은 형들도 너무나 비통해 울다 그 자리에서 모두 돌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 영실 오백장군은 사실은 499장군인데 한 장군은 차귀섬에 있다고 전해 온다.
영실이 분화구라는 것이 새로운 사실로 밝혀지기 훨씬 옛날부터 제주 선인들은 영실을 V자 형태의 계곡이 아닌, 거대한 솥 같은 형태를 갖고 있는 지형임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백 명이나 되는 아들들이 먹을 죽을 쑤려면 이처럼 거대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영실 속에 솟아 있는 숱한 기암들은 솥 속의 삐죽삐죽 드러난 뼈다귀와 같은 존재로 해석, 이처럼 애달픈 전설을 만들어 낸 것이다.
[제주 불교의 발상지, 수행굴]
영실은 예부터 제주인들에게 신성한 공간이었다. 이는 영실을 둘러싼 주변이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낼 뿐 아니라 실제로 기구(祈求)의 터로 이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남명소승』에 따르면 “절벽 아래는 옛 제단 터가 있는데 그 옆에는 복숭아나무가 한 그루가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지금부터 500년 전의 글인데, 당시에도 제단이 있었던 곳을 옛터라고 부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고려시대 이전에 설치됐던 제단임을 짐작키 어렵지 않다. 『남명소승』에는 또 “흰 사슴을 탄 노인이 사슴 떼와 함께 영실에 자라는 불로초를 따먹기 위해 나타난다.”는 전설과 한 절제사가 실제로 백록을 잡아 바쳤다는 기사도 보인다.
영실은 제주 불교의 발상지라고도 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존자암은 한라산 서쪽 기슭에 있는데 그 곳 동굴에 마치 스님이 도를 닦는 것과 같은 돌이 있어 세상에 수행동이라 전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탐라지』에는 앞의 기록을 인용하며 원래 “존자암은 영실에 있었으나 지금은 서쪽 기슭에서 밖으로 10리쯤 옮겼는데, 대정현 지경”이라 소개하고 있다. 또 1601년 한라산을 올랐던 김상헌은 『남사록』에서 “또 수행굴을 지났다. 굴속은 20여 명이 들어갈 만하다. 옛날 고승 휴량이 들어가 살던 곳이다.”라는 기록을 남겼고, 1609년 한라산을 오른 김치 제주판관은 “영실의 동남쪽 허리에 석굴 하나가 있는데, 수행동이라 부른다. 옛날에 도승이 살았다고 하는데 부서진 온돌자국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했다.
이어 1702년 등정했던 이형상은 『남환박물』에서 “위에 수행동이 있다. 동에는 칠성대가 있어 좌선암이라 부른다. 이는 옛 스님이 말한 팔정 옛터인데, 이를 존자암이라고 부른다. (중략) 존자가 암을 짓기는 고량부(高良夫) 삼성이 처음 일어난 때 비로소 이루어졌고, 삼읍이 나누어진 때까지 오래도록 이어졌다. (중략) 지금은 스님이 없고 헐린 온돌만 남아 있다.”고 기록했다.
이들 자료를 보면 존자암의 시원은 삼성의 출현과 때를 같이 하는데, 그 위치는 처음 영실 동남쪽 허리에 있었다가 영실 서쪽 10리 밖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고, 원래 존자암 주변에는 칠성대와 좌선암이 있으며, 이곳을 수행동(동굴 또는 골짜기)이라 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옛날 고승이 도를 닦았던 석굴이 있는데 곧 수행굴이며, 굴 안에는 20여 명이 들어 갈만하고, 지금은 부서진 온돌 자국만 남아 있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처럼 수행굴에 관한 기록은 옛 문헌에 자주 등장한다. 그러면 수행굴은 실제로 어디에 존재하는가. 이처럼 고문헌에 자주 등장하는 명소임에도 수행굴은 오랫동안 향토사학자와 같은 몇몇 사람들 외에는 거의 잊혀져 가던 존재였다. 그런데 2001년 12월 3일 한라산학술탐사팀이 도순천 발원지인 영실 탐사에 들어가면서 수십 년 만에 모습을 다시 드러내게 된 것이다.
탐사팀이 찾은 수행굴은 길이가 대략 20~24m, 최대 폭 5~7m 정도 되는, 마름모꼴 형에 가까운 굴이었다. 굴 가운데는 가로와 세로 약 2m, 두께가 30㎝ 쯤 되는 자연 판석이 놓여 있는데, 바닥과 전면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판석 가장자리는 아궁이 흔적도 남아 있었다. 요리를 하며 판석을 온돌처럼 따뜻하게 달구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옛 기록에 남겨진 ‘부서진 온돌 자국’이었던 것이다.
동굴 구석에는 한 평이 채 안되지만 잘 정돈된 공간이 있다. 그 자리는 온돌로 사용됐던 자리보다 약간 높은 위치인데다 가장 안쪽에 위치하고 있어 도(道)를 닦던 공간이라는 느낌을 준다. 굴속에는 흥미로운 유물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시대를 달리하는 기와편, 토기편, 자기편이 발견됐다. 여러 시대에 걸쳐 사람들이 이 굴을 이용했음을 짐작케 하는 자료들이다.
굴 입구 왼쪽에는 여러 종류의 동물 뼈가 확인되고, 오른쪽은 취사공간으로 사용했는지 검게 그을린 화덕자리가 남아 있었다. 다만 그 곁에 폭삭 삭은 나뭇단이 오랜 세월 인적의 왕래가 없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수행굴이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잊혀져 찾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존자암이 영실 밖 서쪽 10리로 옮겨간 원인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존자암이 옮겨진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중의 하나는 역시 사람이 오래 머물기 힘든 여건 때문일 것이다. 해발 1,300m에 있는 영실은 일년 중 여름철을 제외하고는 추위와 습기가 엄습해 사람들이 머물기 힘든 곳이다. 해발 1,500m에 있는 수행굴은 더욱 그렇다.
한라산에서의 산림 도벌과 방목 금지도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 굴을 사용했던 이들이 오랫동안 굴을 찾지 않으면서 굴의 위치와 존재도 함께 잊혀져간 것이다. 특히 제주 4·3사건으로 한라산 입산이 금지된 것은 결정적 요인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최초로 한라산을 등정한 외국인, 겐테]
서양인으로서는 물론 외국인으로서 한라산을 첫 등정한 이는 지그프리드 겐테(Siegfroied Genthe)[1870~1904] 박사다. 겐테는 독일 출신으로 1901년 이재수의 난이 발생한 지 수 주일 뒤 한라산을 등정하기 위해 제주도에 왔던, 당시 독일 신문의 아시아 특파원이자 지리학 박사였다.
그는 영실 옛 등반 코스를 이용해 한라산을 올랐던 기행문을 남겨 외국인으로서 한라산을 처음 등정한 인물로 남게 되었다. 그는 특히 한라산을 등정한 뒤 2개의 다른 기구를 이용해 한라산 높이가 1,950m임을 최초로 측정하고, 이를 독일의 『퀼른신문』(1901.10.13~1902.11.30)에 연재함으로써 한라산을 서양에 처음으로 소개한 인물이기도 하다.
겐테 박사가 제주 탐험에 나선 것은 온 섬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이재수의 난이 진압된 1901년 5월이었다. 그는 이재수의 난에 대한 책임 규명을 위해 제주에 파견된 황실고문 샌즈를 통해 제주도와 한라산에 관한 정보를 얻은 후, 황실에서 제주목사에게 보내는 친서와 독일대사관의 협조 서한을 갖고 제주 탐험에 나서게 된다. 겐테의 제주 탐험에 관한 기록은 그의 유고집 『섬 탐험과 동해 중국에서의 표류』라는 제목의 책에 실렸다.
수정일 | 제목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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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4 | 기관명 현행화 | 대한지적공사 제주지사 -> 대한지적공사[현 한국국토정보공사] 제주지사 |
2013.11.29 | 띄어쓰기 수정 | [사라져버린 한라산 최고봉, 혈망봉]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혈망봉은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혈망봉은 |
2013.11.29 | 오자 수정 | [제주 불교의 발상지, 수행굴] 신성스러운 분위기 -> 신성한 분위기 |
2013.11.29 | 오자 수정 | [제주 불교의 발상지, 수행굴] 실제로 기구(祈求)의 터로 이용해 왔기 때문이다. -> 실제로 기구(祈求)의 터로 이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