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23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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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瑩 |
영어음역 | Choe Yeong |
이칭/별칭 | 무민(武愍)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김일우 |
[정의]
고려 후기 제주 목호의 난을 진압한 무신.
[개설]
고려 후기 공민왕대에 홍건적, 왜구의 침입을 물리치면서 두각을 나타냈고 우왕 말기에는 최고 권력자로 부상했다. 1388년(우왕 14) 요동 정벌을 결정하고 정벌군 최고 사령관이 되었지만, 이성계가 단행한 위화도 회군으로 실각하고 숙청되었다.
[가계]
본관은 동주(철원). 아버지는 사헌규정 최원직(崔元直)이며 어머니는 삼한국대부인 지씨이다. 부인은 문화유씨이다.
[활동사항]
1374년(공민왕 23) 제주에서 목호의 난이 일어나자, 최영은 목호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편성된 출정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당시 출정군은 수도권과 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차출된 정예군 2만 5,605명과 전함 314척의 규모로 편성되었다. 이는 국경 지대까지 더하여 동원하였던 요동 정벌군 3만8,830명과 견줄 만한 전력이었고, 제주도 인구와 맞먹은 병력이었다.
출정군은 목호군과 제주의 서쪽 명월촌으로부터 어름비·밝은오름·검은데기오름·새별오름·연래·홍로에 이르기까지 주야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전투에 밀린 목호군 수뇌부가 서귀포 앞바다 범섬으로 피하자 최영은 배 40척으로 직접 범섬으로 들어갔다. 이에 목호군 수뇌부는 항복하거나 혹은 벼랑으로 몸을 던져 자살하기에 이르렀다.
최영은 범섬 전투 이후 사태를 수습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목호 석다시만(石多時萬)·조장홀고손(趙莊忽古孫) 등이 수백 명을 거느리고 계속 저항하자, 성을 쳐부수고 도망가는 무리를 샅샅이 찾아내 전부 죽였다.
최영이 제주에서 한달여 간 전투를 벌였던 목호 세력의 평정은 “우리 동족이 아닌 것이 섞여 갑인(甲寅)의 변을 불러들였다. 칼과 방패가 바다를 뒤덮고 간과 뇌는 땅을 가렸으니 말하면 목이 메인다”고 묘사될 정도로 고려와 목호 세력 사이의 총력전이었다. 이로써 제주에서의 목호 세력은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제주 지역은 1273년(원종 14)에 제주 삼별초가 여몽연합군에 의해 정벌된 직후에 원나라의 직할령이 되었고, 이후 고려에 환속되었어도 실질적으로는 양국에 이중으로 귀속된 상태였다.
최영이 제주에서 목호 세력을 정벌하였던 것은 고려가 자주성을 회복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몽고족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이루어졌지만, 제주 사람들은 커다란 희생을 치루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동안 몽고족과 더불어 살았던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계기로도 작용하였다.
[묘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 70-2번지에 있으며 경기도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무민(武愍)이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추자면 대서리 155번지[대서4길 3-13]에 사당이 있으며 제주도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