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2322 |
---|---|
한자 | 蔡龜錫 |
영어음역 | Chae Guseok |
이칭/별칭 | 대여(大汝),초은(樵隱),채두석(蔡斗錫)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성격 | 문신|제주판관|대정군수 |
---|---|
출신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
성별 | 남 |
생년 | 1850년(철종 1) |
몰년 | 1920년 |
본관 | 평강 |
대표관직 | 제주판관|대정군수 |
[정의]
조선 말기 제주판관·대정군수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평강. 자는 대여(大汝), 호는 초은(樵隱). 일명 채두석(蔡斗錫)이라도 한다. 아버지는 채종관(蔡宗寬)이며 어머니는 홍씨이다.
[활동사항]
1893년(고종 30) 11월 김응우(金膺友)의 후임으로 제주판관에 부임하고, 1895년(고종 32) 1월 15일 대정군수로 전임되었다. 1896년(고종 33) 3월 강유석(姜瑜奭)·송계홍(宋啓弘) 등이 민란을 일으켜 경무청을 파괴하자, 4월 관군을 거느리고 민란을 진압하였다.
1898년(고종 35) 3월 대정군수에서 이임하였다가 1899년(고종 36) 7월 신재호(愼哉祜)의 후임으로 다시 대정군수로 부임하였다. 1900년(고종 37) 대정현 정당(政堂)과 현성(縣城)의 동문·서문을 중건하였다.
사설 상무사(商務社)의 회장이 되어 부회장 오대현(吳大鉉), 향유(鄕儒) 송희수(宋希洙)와 함께 상무사를 주도하였다. 1901년 5월 천주교도인 대정군의 부이방(副吏房) 김옥돌(金玉乭)이 향장 오대현의 기처(妓妻)를 간음한 사건이 비화되어 상무사 회원과 천주교도 간에 충돌하면서 민란이 일어났다.
민란이 일어나기 직전 채구석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상무사를 해체시켰다. 그러나 봉세관(捧稅官) 강봉헌(姜鳳憲)이 상무사의 대표격이었던 채구석을 이 사건의 책임자로 조정에 무고하여 대정군수에서 파면시켰다. 민란의 전개 과정에서 민란군과 천주교회 사이를 오가며 타협을 시도하였지만, 천주교회 측으로부터 민란의 주범으로 인식되어 곤욕을 치루기도 하였다.
민란이 진압된 뒤 1901년 7월 13일 이재수 등 민란 주동자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았다. 채구석의 처리 문제는 대한제국 정부와 천주교회 사이에 매우 민감한 사안으로 부각되었다.
제주도민들은 채구석의 석방을 조정에 청원하였고, 1903년(고종 40) 홍종우(洪鍾宇) 신임 제주목사도 채구석의 석방을 라크루(Marcel Lacrouts) 신부에게 요청하였다. 결국 채구석은 1903년 9월 26일 평리원에서 징역 2년 6개월 태형 90대의 형을 선고받고, 1903년 11월 중순 배상금 문제를 책임진다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만년에 중문에 살면서 천제연(天帝淵)의 물을 농업용수로 이용하기 위해 수로를 만들어 성천봉 아래로 유입시켜 5만여 평의 논을 조성하였다. 1912년 제주금융조합을 설립하여 초대 조합장이 되었다.
[상훈과 추모]
1957년 8월 채구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중문동 천제연 입구에 통정대부대정군수채구석기적비(通政大夫大靜郡守蔡龜錫紀蹟碑)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