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22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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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民族靑年團濟州道團部 |
영어공식명칭 | Korean National Youth Corps, Jeju Branch |
영어음역 | Joseon Minjok Cheongnyeondan Jejudo Jibu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현혜경 |
성격 | 우익 단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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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연도/일시 | 1947년 11월 5일 |
해체연도/일시 | 1948년 말 |
설립자 | 이범석[조선 민족 청년단] |
[정의]
1947년부터 1948년까지 제주시에서 활동했던 우익 단체.
[개설]
광복군 출신 이범석이 광복 후 한국 사회의 사상적 갈등 타개와 청년 수련을 위해 1946년 10월 9일 설립한 우익 계열의 단체가 조선 민족 청년단이다. 1946년 11월 미군정 당국의 재정적인 지원에 힘입어 수원에 훈련소를 개설하고 훈련생을 선발, 훈련시킨 후 출신 혹은 거주 지역으로 파견하여 하부 조직을 결성, 강화해 나감으로써 전국적으로 막강한 조직을 가지게 되었다.
[설립 목적]
조선 민족 청년단 제주도 단부는 이범석을 단장으로 정치적 실망과 경제적 혼란 및 사상적 갈등을 타개하는 데 새로운 힘의 원천으로 요구되는 청년의 수련을 목적으로 1947년 11월 5일 설립되었다.
[변천]
제주에 조선 민족 청년단[약칭 족청(族靑)]이 상륙을 시도한 것은 서울 결성 1년 뒤인 1947년 10월이다. 이 시기는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어 한반도 문제가 UN으로 이관되면서 우익 진영이 강화된 때이다. 조선 민족 청년단의 지부 결성은 중앙에서 조직 위원들이 내려와 칠성통에 임시 사무소를 설치하는 등 오히려 중앙에서 적극성을 띠고 추진하였다.
이억(李億), 김한익(金漢翊), 김선희(金瑄熙), 김용청 등이 주도하였는데, 중앙 조직의 적극적인 움직임에 힘입어 1947년 11월 5일 ‘조선 민족 청년단 제주도 단부’ 창립 위원회 결성식이 거행되었다.
결성식은 제주읍사무소 회의실에서 개최되었으며, 위원장에 최남식, 부위원장에 문봉택, 오광해 등이 각각 선출되었다. 그러나 제주도 건국 준비 위원회[약칭 제주도건준] 부위원장을 지낸 최남식은 그날로 사의를 표명, 새 단장에 백찬석이 피선되었다.
이후 같은 우익 계열과의 마찰이 있었고 얼마 못 가 1948년 말에 대동 청년단과 함께 대한 청년단으로 흡수·통합되었다.
[활동 사항]
창립 후 조선 민족 청년단 제주도 단부는 학생 조직을 확산하여 1947년 12월 7일 제주 극장에서 ‘민족 학생과’ 창립 총회를 갖고 학생과장에 정태규, 총무부장에 김광우 등을 선출하였다.
우익 청년 단체의 후발 조직인 조선 민족 청년단은 단원들을 확산해 가는 과정에서 대동 청년단[약칭 대청], 서북 청년단[약칭 서청] 등 기존의 우익 청년 단체와 잦은 마찰을 빚기도 했다. 조선 민족 청년단은 1948년 5·10 단독선거를 앞두고 선거 참여 문제를 놓고 열띤 토의를 벌인 끝에 결국 총선에는 참여하되 공개적인 발표는 하지 않고 각 도단부와 시·군단부의 선거구 형편에 따라 국회 의원 후보 출마를 결성하도록 위임하는 등 다소 소극성을 띠었다.
이는 단독 정부 수립을 주도하던 이승만 계열에 불만 요소로 작용하였고, 4·3 사건으로 분위기가 험악해질 때 조선 민족 청년단 단원들마저도 빨갱이로 몰려 진압군에 의해 집단 사살되는 사례도 있었다. 이를 ‘족청 탄압 사건’이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