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20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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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濟州城址 |
영어음역 | Jejuseongji |
영어의미역 | Jejuseong Fortress Sit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 1437-6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김동전 |
문화재 지정 일시 | 1971년 8월 26일 - 제주성지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3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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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제주성지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재지정 |
성격 | 성터 |
원건물 건립시기/일시 | 삼국시대 |
소재지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 1437-6 |
소유자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문화재 지정번호 |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에 있는 삼국시대 탐라국 수부(首府)의 성곽으로 축성된 성터.
[개설]
제주성은 삼국 시대 탐라국 수부의 성곽으로 축성되었으나 원래의 규모와 축성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읍석성(邑石城)의 둘레는 910보”라고 하였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읍성은 석축으로 둘레가 4,394척이고 높이는 11척”이라고 하였다.
성 안에는 물이 없고 성 남쪽 큰 바위 밑에 물이 솟아나오는 한 길 깊이의 큰 구멍이 있어서 이를 ‘가락귀(嘉樂鬼)’라고 부르고, 사람들이 별도로 겹성을 쌓아 물을 길어 왔다는 기록이 보인다.
제주성의 형태는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으나 1925년부터 추진된 제주항 개발 사업 때, 성벽을 매립 골재로 사용하면서 대부분 사라져서, 현재 제주 삼성혈과 관덕정의 중간 지점에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변천]
제주성지는 고려 숙종 때 둘레 4,700척, 높이 11척으로 확장하여 새롭게 정비하였다. 조선시대로 들어선 뒤에는 1411년(태종 11)에 왜구의 잦은 침입을 막기 위해 수축하였으며, 1565년(명종 20)에는 제주목사 곽흘이 동쪽 높은 응선까지 퇴축을 하였다.
1653년(효종 4) 제주목사 이원진이 동문과 서문, 남문을 세우고 산지천 남쪽과 북쪽에 수구문을 설치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인 1599년(선조 32)에 제주목사 성윤문이 제주성을 보완하기 위해 성의 아랫부분을 5척이나 확장하고 높이를 13척으로 높이는 대대적인 개축 공사를 실시하였다.
1780년(정조 4) 산지천이 범람하여 민가가 물에 잠기자, 제주목사 김영수가 산지천 서쪽에 바위로 간성을 쌓기도 하였다. 1925년부터 추진된 제주항 개발 사업 때 성벽을 매립 골재로 사용하면서, 당시 제주측후소 부근과 현재의 오현단 부근 성곽만 남기고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형태]
성벽은 돌을 좁게 쌓은 형태로, 단면은 직선형이다. 치성은 3개소가 남아 있다. 산지천과 인접한 동쪽 치성은 원형이 잘 보존되어 당대의 축성법을 보여 주고 있다.
[현황]
원래의 성은 대부분 없어지고, 오현단 남쪽 언덕 위에 성벽의 일부와 도로 동쪽의 치성을 포함하여 약 170m 정도의 성벽이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제주성은 탐라국 수부의 성곽으로서 삼국 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중요한 방어 시설로서 왜적의 침입을 막아내었다. 동문과 서문, 남문 등을 함께 복원하여 제주성의 의의를 새롭게 다질 필요가 있다고 평가된다. 1971년 8월 26일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