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19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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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濟州道地區戰鬪司令部 |
영어음역 | Jejudo Jigu Jeontu Saryeongbu |
영어의미역 | Jejudo Zone Command Post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장윤식 |
[정의]
제주 4·3 사건 진압을 위해 제주도에 설치되었던 대한민국 육군의 전투 부대.
[설립 목적]
4·3 무장봉기에 의해 무산된 1948년의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5·10 선거는 몇 번의 연기를 거쳐 1949년 5월 10일 실시하기로 방침이 정해졌다. 이미 1949년 2월 이후 무장대 활동이 급격히 쇠퇴했지만 여전히 무장대는 존재하고 있었고, 한라산에는 피난민들이 대거 몰려 있었다.
이에 정부는 조기 진압을 통해 1949년 5·10 재선거를 무사히 치르기 위해 제주도 지구 전투 사령부를 설치했다. 여기에는 제주 4·3 사건을 조속히 진압해야만 미국의 원조를 원활히 받을 수 있다는 이승만 정부의 인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변천]
총사령부에서는 1949년 3월 2일 제주도 지구 전투 사령부를 설치하고 사령관에 육사 부교장 유재흥 대령을 임명하고 참모장에 제2연대장 함병선 중령을 겸임 보직하였다. 이에 더해 김용주 소령의 독립 유격 대대를 투입하여 적극적인 소탕 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유재흥 사령관에게는 기존에 제주에 주둔하고 있던 2연대와 유격 대대 병력 외에 제주도 경찰과 응원 경찰, 우익 청년단 등을 통합, 지휘하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응원 경찰인 경찰 특별 부대[사령관 김태일 경무관]는 이미 2월 19일 505명이 파견되어 있었다.
미군 정보 보고에 의하면 1949년 4월 1일 현재 유재흥 사령관이 지휘하는 토벌대는 한국군 2,622명, 경찰 1,700명, 민보단 약 5만 명으로 편성돼 있었다. 또한 육군 본부는 해상 봉쇄를 위해 해군의 제3특무정대[사령관 남상휘 중령]를 지원받아 육·해·군 합동 작전을 펴도록 했다. 선거를 치른 후 5월 15일 해체되었다.
[활동 사항]
제주도 지구 전투 사령부가 설치된 기간은 1949년 3월 2일부터 5월 15일까지이지만, 유재흥 사령관은 3월 마지막 주에야 제주에 도착해 지휘권을 잡았다. 따라서 작전 기간은 제2연대장 함병선이 주도한 제1기[3월 2일~3월 마지막 주]와 유재흥 사령관이 제주에 도착해 작전을 지휘한 제2기[3월 마지막 주~5월 15일]로 나눌 수 있다.
제2연대장 함병선은 서귀 중학교에서 국민학교 직원, 중학교 직원, 면과 군 직원, 청년단 간부들에게 1개월의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들은 군 1개 분대, 경찰 1개 분대, 민보단 25명으로 1개 소대를 편성하여 소위 ‘하찌마끼도로’[일본군이 한라산을 요새화하기 위하여 개설한 전술 도로]를 이용한 침투 작전도 전개했다.
국방부의 종합 전과에 따르면 제2연대장 함병선이 3월 1일부터 말일까지 일대 섬멸전을 펼친 결과 이 기간에 사살 821명, 생포 999명 등이 있었는데, 이들 피살자와 포로 중에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산으로 피난했던 다수의 민간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3월 마지막 주에 제주에 도착한 유재흥 사령관은 그때까지 해안 마을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을 산악 지역으로 전진 배치하여 남아 있는 무장대의 체포에 주력하는 한편, 2만 명 가량의 민간인이 산중에 피난해 있는 걸로 보고 이들을 하산시키기 위한 대대적인 선무 활동을 벌였다.
공중에서 선무 전단[삐라]을 살포하고 공작원을 파견하는 등 적극적인 선무 활동 결과 대부분의 민간인이 귀순했다. 하지만 귀순한 민간인 중 청년층 등 상당수는 군사 재판을 받아 사형이 집행되거나 형무소로 이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