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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인민 위원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1972
한자 濟州島人民委員會
영어음역 Jejudo Inmin Wiwonhoe
영어의미역 People's Committee of of Jeju-do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장윤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정치 단체
설립연도/일시 1945년 9월 22일연표보기
해체연도/일시 1947년 3월연표보기

[정의]

해방 직후 제주도에 결성되었던 정치 조직.

[설립 목적]

제주도민의 역량을 민족의 자주 통일 독립과 완전한 해방을 위해 결집하여 민족의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변천]

제주도 인민 위원회는 제주도 건국 준비 위원회에 뿌리를 두고 있다. 면 단위의 조직이 먼저 결성되어, 8월 말 서귀면, 9월 8일 제주읍, 9월 6일~7일 대정면 등에서 조직을 완료하였다.

9월 10일 제주도 건국 준비 위원회가 1읍 11개 면 건준 대의원 대표 4~6명 씩 100여 명과 많은 도민이 참가한 가운데 제주 농업 학교 강당에서 결성됐다. 이날 결성식에서 임원진 선출, 행정권 이양 문제, 치안 문제, 당면한 경제 문제 등이 협의되었다. 위원장은 1932년 제주도 야체이카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오대진, 부위원장에 제주읍 건국 준비 위원장이었던 최남식이 선출되었다.

미군이 진주하기 직전인 1945년 9월 6일 조선건국 준비 위원회는 조선 인민 공화국을 선포하고 각 지역 인민 위원회 조직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제주도에서도 제주도 건국 준비 위원회의 조직과 인력을 기반으로 9월 22일 제주 농업 학교에서 각 읍면 대표들이 참여한 가운데 제주도 인민 위원회 결성식을 갖고 기본 정책 노선을 채택하였다.

위원장에 오대진, 부위원장에 최남식이 선출되었으며 나머지 지도부들도 조선건국 준비 위원회 인사들이 거의 그대로 계승하였다. 이에 따라 각 읍면에서도 9월 하순부터 인민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인민 위원회는 읍면 단위뿐만 아니라 각 리별로 조직되기도 했다.

[활동 사항]

1945년 해방 직후 인민 위원회는 행정 기능보다는 치안 활동에 주력했다. 이는 인민 위원회가 행정 기구임을 표방했지만, 미군정에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주도 곳곳에서는 자치 기능을 했던 징후가 보인다.

한림에서는 창고에 저장된 고구마를 주민들에게 배분했는가 하면, 남원읍 수망리에서는 마을 공동으로 길 닦는 일과 누에치기, 축산, 일반 농사법 교육을 시행했다. 학습회, 체육 대회 등도 주도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야학과 학교 설립 사업 등을 추진했다. 또 대부분의 면사무소에서는 중요한 행정 업무를 추진할 때 사전에 인민 위원회 간부들과 협의하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 있었다.

인민 위원회의 치안 활동은 청장년으로 편성된 치안대·보안대에서 주로 맡았다. 치안대는 도박, 부녀자 희롱, 폭행 사건 등을 단속하는 한편, 8·15 해방 직후 친일 행위자에 대한 징벌과 일본 패잔병의 횡포를 막는 일도 중요한 업무였다.

또 일본 패잔병과의 물자 매매를 막는 일도 맡았다. 미군정이 1945년 10월 말경 제주도 내 치안대 간부들을 소집하여 친일파에 대한 테러 행위를 중단하되 일본군의 물자 매각이나 소각 행위 등은 막아 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비록 미군정 당국으로부터 행정 기관으로 공인받지는 못했지만, 상당 기간 치안 활동의 협력 파트너 역할을 했다.

제주도 인민 위원회는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발생한 시위 군중에 대한 발포로 촉발된 좌익 주도의 10월 봉기에는 불참한 반면, 좌익 세력이 보이코트한 1946년 10월 입법 의원 선거에는 참여해 인민 위원회 활동가들인 구좌면 인민 위원장 문도배(文道培)와 조천면 인민 위원회 문예부장 김시탁(金時鐸)을 당선시켰다. 이들은 서울에 올라가는 즉시 민족주의 민족 전선 회관에서 입법 의원 사퇴를 선언했다.

이들 사례들은 제주도 인민 위원회가 중앙의 좌익 세력으로부터 일정하게 독립적인 활동을 했고 온건한 노선을 걸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10월 봉기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인민 위원회의 조직이나 역량이 1947년 제주 경찰서 앞에서의 3·1절 발포 사건 때까지도 온전하게 보전될 수 있었던 점 등은 다른 지방과 다른 현상이었다.

[현황]

제주도 인민 위원회는 제주도 건국 준비 위원회의 조직 체계를 이어받아 위원장, 부위원장, 총무부, 보안부, 산업부, 선전부 등으로 구성됐고 약간 명의 집행 위원이 있었다. 산하 조직으로 청년 동맹, 부녀 동맹, 소비조합 등이 있었는데, 치안대 활동은 주로 청년 동맹 제주도 위원회 산하 간부들이 맡았다.

[의의와 평가]

제주도에 하나밖에 없는 정당인 동시에 모든 면에서 정부 행세를 한 유일한 조직이었다는 미군정 보고서의 표현대로 제주도 인민 위원회는 제주도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바탕으로 해방 직후 제주 사회를 주도했다.

그 특징은 첫째, 민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자치 기구였다는 점, 둘째, 독립 운동 경험자들이 주도했다는 점, 셋째, 온건했다는 점, 넷째, 존속 기간이 전국적으로 가장 길었다는 점, 다섯째, 현지 미군정과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 여섯째, 중앙이나 전라남도 인민 위원회 조직과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 등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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