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18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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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濟州記者團 |
영어음역 | Jeju Gijadan |
영어의미역 | Jeju Press Corps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문교 |
[정의]
일제 강점기 제주 지역에 있었던 언론인 단체.
[설립목적]
제주기자단의 설립 목적은 창립 총회에서 채택한 강령과 결의 사항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는 엄정한 필봉과 공명한 비판으로 대중의 여론을 대표하며, 사계(斯界)의 자유 획득과 권위 신장을 기한다.”라는 강령에는 창립 취지가 표방되어 있다.
결의 사항은 언론에 관한 건, 지방 언론과 통일에 관한 건, 언론 집회 및 결사에 관한 건, 현행 신문지법 및 출판법에 관한 건, 사회 운동에 관한 건, 지국·분국장 임명에 관한 건, 지방기자 채용에 관한 건, 전 조선기자 통일기관 조직에 관한 건 등 8개 항이다
[변천]
제주기자단은 1926년 3월 14일 조선일보 제주지국 사무실에서 제주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각 신문사 기자 15명이 참석하여 창립 총회를 열었다. 창립 총회는 한상호의 사회로 진행하여 강령과 결의 사항을 채택하고, 집행위원 6명을 선출했다. 집행위원은 홍순녕, 고성주, 윤석원, 고병희, 고정건, 한상호이다.
창립 총회에서는 강령과 결의 사항을 채택한 것 외에도 전 조선기자 통일기관 조직을 서울에 있는 무명회(無名會)에서 발기하도록 의뢰서를 발송하고, 조직체는 각 지방 기자단을 단위로 하되 우선 발기 단체를 모집할 것을 제안하기로 했다.
무명회는 언론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1921년 11월 27일에 결성된 일제하의 대표적인 언론단체이다. 무명회는 ‘신문과 잡지에 대한 검열 및 허가 제도의 철폐’를 위해 노력할 것을 결의하였다. 1925년에는 전조선기자대회를 개최하는 등 순수한 언론 활동뿐 아니라 사회 문제까지 참여하여 여론 형성을 주도했다.
집행위원회는 1926년 3월 15일 시대일보 제주지국에서 회의를 열고 『동아일보』 발행 정지에 관한 건, 부인견학단(婦人見學團)에 관한 건을 결의했다. 부인견학단은 여성단체에서 발기하도록 하고 견학 활동을 기자단이 후원하기로 했다.
『동아일보』 발행 정지에 관한 건은 1926년 3월 『동아일보』 제2차 무기정간 처분 사건을 말한다. 『동아일보』는 당시 모스크바의 국제농민조합본부에서 3·1운동 기념일을 기하여 ‘조선농민들에게’라는 동정과 격려를 내용으로 한 전보문을 보내온 것을 보도한 이유로 정간 처분을 받았다. 정간 처분은 1개월 반만에 해제됐으나 발행인 김철중(金鐵中), 주필 송진우(宋鎭寓)는 「보안법」과 「신문지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각각 3개월과 9개월의 징역형을 받았다.
[주요사업과 업무]
제주기자단은 결성 이후 친목 활동과 전국기자조직과의 연대, 공동취재 활동 등을 폈다.
[활동 사항]
제주기자단이 창립 총회에서 전 조선기자 통일기관 조직을 무명회에 건의하기로 한 안건은 1925년 4월 15~17일까지 3일 동안 서울에서 열린 전조선기자대회와 연관되어 있다. 이때 열린 전조선기자대회는 무명회 주관으로 개최하여 ‘언론 권위에 관한 건’, ‘신문 및 기타 출판물에 대한 현행 법규에 관한 건’, ‘언론 집회 및 결사의 자유에 관한 건’ 등을 의안으로 논의했다. 이 대회에는 전국에서 기자 463명이 참석했다.
제주기자단의 취재 활동으로 ‘추자면민 저항 운동’을 공동 취재하여 보도한 기사도 있다. 이 사건은 1926년 5월 14일 추자어업조합이 면사무소 직원과 공모하여 주민의 의견을 무시하고 천초를 강제로 매입하려다 이에 반발한 주민 7백여 명과 경찰이 충돌한 주민 저항 운동으로 주동자 21명이 체포되었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제주기자단은 홍순일, 윤석원 두 기자를 현지에 보내어 진상을 취재하여 공동 보도했다.
[의의와 평가]
제주기자단은 일제의 민족 언론에 대한 억압이 극심하던 때에 제주 지역에서 결성된 언론 단체로서 전국 기자조직과 연대하여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