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18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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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濟州甕器 |
영어음역 | Jeju onggi |
영어의미역 | Jeju pottery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집필자 | 강창언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에서 전통적으로 생산하여 사용하던 옹기.
[개설]
단벌소성으로 완성되는 그릇으로 음료수·생활용수·곡식·씨앗 등을 보관하던 것들이 주류를 이룬다. 유약을 칠하지 않은 옹기가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간혹 유약을 칠한 옹기들도 있다. 노랑그릇, 검은그릇, 옹기, 도기, 지새그릇, 토기 등이 있다.
[역사 및 변천]
『남사일록(南槎日錄)』에 수록된 1488년의 최부(崔溥)의 「탐라시」에 “허벅 진 촌아낙네 물 길러 샘으로 가고”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1658년의 『장수당기(藏修堂記)』에는 “장수당기… 학사를 짓기 시작하여 김진용이 주관하였다. 재목은 한라산에서 벌채하여 바다로 운반하고, 기와는 도기(陶器)를 만드는 양질의 점토(粘土)를 이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제주도의 도토(陶土)가 공식 거론되는 것이고, 1658년에는 이미 옹기의 생산과 사용이 보편화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익태(李益泰)의 『지영록(知瀛錄)』에는 이증(李增) 목사의 「탁라가」가 있다. 그 2행에 “집집마다 항아리에는 굿을 할 때 올릴 술이 있고”, 3행에 “허벅 진 촌 아낙네 구슬픈 방아노래 ”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1679년(숙종 5) 제주도에는 항아리 술을 빚고 있으며, 굿을 할 때 사용하였다는 것과 허벅 진 여자들이 오가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당시의 항아리와 허벅은 이미 실생활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사실적으로 보여 주는 예라 하겠다.
1703년(숙종 29) 이형상(李衡祥)의 『탐라순력도』에는 허벅을 지고 다니는 아낙네들이 그림으로 등장한다. 1750년대 간행된 『제주읍지』에는 “대정현성 서북 소로를 5리 정도 가면 ‘가미수’에 제주옹기를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옹점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300년 전 쯤에 현재의 대정읍 신평리 부근에서 대량의 옹기가 생산되고 있었으며, 전문적으로 유통되었다고 이해되는 것이다.
이러한 옹기는 1900년대 들면서 절정기를 맞았고 1948~1959년경까지 폐쇄기에 접어들다가 1960년대 말에 맥이 완전히 끊겼다. 서귀포시 영락리 ‘제주도예촌’에서 1994년부터 복원에 착수, 2000년에 복원에 성공한 옹기들과 그에 따른 기능들이 공개되면서부터 제주옹기가 생산 보급되고 있다.
[만드는 법]
제주 점토를 가지고 ‘토래미’라고 불리는 흙판을 만들고 난 다음에 통(桶)으로 붙여 나무도구를 이용하여 두들겨서 만든다. ‘움집’이라는 흙과 돌로 만든 집에서 6~10개월 정도를 보관한다. ‘섬피’라고 하는 살아 있는 나뭇가지를 묶어 말린 연료를 이용하여 3일 내외를 밤낮으로 소성한다.
제주옹기는 크게 노랑그릇과 검은 그릇으로 구분된다. 노랑그릇은 유약 없이 불의 온도로 옹기의 표면에 유약의 효과를 낸다. 1200℃ 내외에서 산화소성(酸化燒成)을 한다. 그래서 옹기의 표면 색깔이 갈색으로 나타난다. 물·술·간장과 같은 섭취용 액체, 된장·곡식·씨앗·소금과 같은 물질을 보관하는 것으로 사용된다.
검은 그릇은 소성하다가 대략 700℃ 쯤에서 아궁이와 배연구를 막아서 불연소된 연기가 그릇에 스며들도록 한다. 이른바 환원소성(還元燒成)을 하는 셈이다. 그래서 그릇이 표면이 회색으로 나타난다. 물이나 곡식을 보관하며, 시루와 같은 음식 제작용구 및 향로 같은 제사용 그릇들이 주류이다.
[형태 및 종류]
제주옹기는 허벅을 중심으로 하여 큰 것들을 ‘웃자리’, 작은 것들을 ‘알자리’라 한다. 전자에는 허벅·통개(항아리)들이 주류를 이룬다. 후자는 작은 규모의 허벅과 뚜껑으로 쓰이는 ‘장태’, 작은 항아리인 ‘망대기’, 그리고 병과 단지류이다. 노랑그릇과 검은그릇에서 생산된 형태가 120여 종이 있다.
[의의와 평가]
석요는 세계에서 유일한 돌가마이다. 특히 ‘노랑굴’이라고 하는 무시유 옹기는 희귀하여서 도자사(陶瓷史)와 미술사에서 구명되어 재평가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