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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1807
한자 現代史-試鍊濟州-
영어음역 Hyeondaesaui Siryeon Jeju 4·3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현대/현대

[3·1사건이 발발하다]

1947년 3·1절 기념대회가 각 읍·면별로 치러졌고, 제주 북국민학교에는 제주읍·애월면·조천면 주민 3만여 명이 모였다. 제주읍에서는 북국민학교 행사가 오후 2시에 끝나자 곧바로 가두시위가 벌어졌다. 관덕정을 거쳐서 서문통으로 시위대가 빠져나간 뒤 관덕정 부근에 있던 기마 경찰의 말굽에 어린아이가 다치는 사태가 일어났다.

흥분한 관람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하자 곧바로 관덕정 부근에 포진하던 무장경찰이 총격을 가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구경나온 민간인 6명이 사망했다. 이들 가운데는 15세 초등학생과 젖먹이 아이를 가슴에 안은 채 피살된 여인도 있었다.

이 발포 사건으로 제주도 내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러나 미군정과 경찰은 사태 수습보다는 시위 주동자를 검거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이에 좌익 진영은 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미군정과 경찰의 만행을 폭로하며 희생자 구호금 모집에 돌입했다. 그리고 3월 10일 제주도청을 시발로 총파업이 이어졌다. 도청 등 관공서는 물론 은행·회사·학교·운수업체·통신기관 등 도내 166개 단체에 41,211명이 파업에 들어갔고, 현직 경찰관까지 파업에 동참했다.

조병옥은 총파업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3월 19일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경찰의 발포를 정당방위로 항변하고, 북조선과의 통모로 사건이 발생했다고 하여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조장하였다. 이 사건 직후 미군정 보고서에는 “제주도는 70%가 좌익 정당에 동조적이거나 좌익 정당에 가입해 있을 정도로 좌익의 본거지”라고 기록하여 미군정의 일관된 제주도 인식을 엿볼 수 있다.

미군정은 3·1사건이 마무리되어가자 미군정은 관공리와 교육계에 대한 숙청 작업에 착수하여 총파업에 가담한 사람들을 파직시켰다. 파업에 동참한 경찰관 66명도 파면되었다. 또한 철도 경찰 245명을 모집하여 제주도에 배치시켰다. 4월 말 제주도의 경찰 병력은 500명에 이르게 되었다. 서북청년회 회원이 대거 제주도에 들어와 만행을 저지른 것도 이때 이후의 일이었다.

[결사 항쟁을 결의하다]

3·1사건 후 제주도 좌익 진영은 미군정의 계속되는 탄압에 직면하였다. 1948년 초 조직의 핵심 간부들이 대거 검거되어 조직이 궤멸 상태에 빠졌다. 2·7투쟁을 거치면서 전도적으로 검거 바람이 불었고, 붙잡힌 청년들에 대한 가혹한 취조가 이루어졌다.

조천에서는 3월 6일 조천중학원 학생 김용철이 혹독한 고문으로 숨졌고, 14일에는 모슬포지서에 끌려간 대정면 영락리 출신 양은하가 경찰의 구타로 숨졌다. 또한 3월말 한림면 금릉리에서는 박행구라는 청년이 서북청년회 단원에 붙잡혀 곤봉 등으로 무수히 구타를 당한 뒤 총살되었다.

궁지에 몰린 제주도 내 좌익 진영은 결사 항쟁을 하자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결국 여러 번에 걸친 비밀회의 끝에 경찰과 서북청년회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기로 결의하였다. 게다가 다가오는 5·10 단독 선거는 봉기 결행의 주요 명분으로 내걸어졌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봉화가 타오르다]

제주도 내 각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올랐다. 한라산에 들어간 300여 명의 무장대는 도내 12개 경찰 지서, 우익 단체원들의 숙소와 집을 습격하였다. 경찰 4명, 민간인 8명과 무장 대원 2명이 사망하였다.

미군정은 4·3이 발발하자, 4월 5일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1,700명의 경찰을 증파하여 사태에 대처하였다. 그러나 경찰력만으로 사태 해결에 한계가 있음을 인식한 미군정은 모슬포 주둔 경비대 제9연대에 대해서도 진압 작전에 나설 것을 지시하였다.

선무 작전으로 사태를 진정시키려던 제9연대장 김익렬은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의 권유에 따라 무장대 측에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을 제의하였다. 4월 말 무장대 측이 마련한 장소에서 이루어진 협상에서 타협점을 찾은 양측은 전투 중지를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 협상 결과를 미군정 수뇌부는 거부하였다. 오히려 김익렬이 확인한 무장대의 정보를 활용해 더욱 강력한 토벌 정책으로 선회하였다.

5월 1일에는 오라리에서 우익 단체원들이 마을을 방화하고는 무장대 측이 저지른 것으로 위장하여 평화 협상 분위기를 깨뜨려 놓았다. 5월 6일 제주에서 미군정 수뇌부가 참석한 가운데 긴급대책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무장대와의 협상을 주도한 김익렬은 문책을 받아 해임되고, 다음날 9연대장은 박진경 중령으로 교체되었다. 이제 강경 진압의 길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무장대측도 강경한 투쟁으로 일관하였다. 무장대는 5·10단선에 대한 적극적인 거부투쟁을 전개하였다. 5월 7일부터 10일까지 선거사무소를 집중 공격하고 선거관계 공무원을 납치하는 한편, 선거인 명부를 탈취했다. 각 마을 주민들도 선거를 하지 않기 위해 투표 전날 이불과 간단한 식량을 짊어지고 산으로 피해 갔다. 5월 10일 선거 당일에 무장대는 중문·표선·조천 등지에서 투표소를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무장대 측 21명, 경찰 1명, 우익 인사 7명이 사망했다.

결국 제주도 선거는 3개 선거구 중 남제주군 선거구만 간신히 치러져 무소속의 오용국이 당선되고, 북제주군의 2개 선거구는 투표율이 모자라 무효로 처리되었다. 5·10선거의 거부는 미군정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져, 제주민들에 대한 대탄압이 예견되었다. 미군정은 더욱 강력한 토벌 작전을 지시하였다.

경비대 병력은 기존 9연대 1개 대대와 부산 5연대에서 차출된 1개 대대, 새로이 11연대 1개 대대가 파견되어 모두 3개 대대로 강화되었다. 박진경은 11연대장에 취임하여 본격적인 토벌에 나섰다. 조병옥도 담화를 발표하여 ‘강경진압 방침’을 분명히 하고, 경찰 특수부대를 파견하는 한편 서북청년회 단원을 계속 증파했다. 경비대가 주도하는 본격적인 토벌 작전이 전개되었다. 5월 27일까지 포로의 수는 3,126명에 달했고, 6월 중순에는 무려 6,000여 명에 달하게 되었다.

무리한 토벌이 이루어지자 서서히 경비대의 강경 방침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5월 20일 밤 9연대 병사 41명이 탈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은 무기와 장비, 그리고 5,600발의 탄약을 소지하고 모슬포 주둔지를 빠져나가 대정지서를 공격하여 일부는 입산하였다. 10여 명씩, 혹은 몇 명씩 병사들이 부대에서 탈출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6월 18일에는 박진경이 부하에게 사살되었다.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배경용·신상우 등 4명이 체포되고, 군법회의를 거쳐 처형되었다.

4·3의 와중에서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는 수립되었고 북한에서도 9월 9일 정부가 수립되어 분단 체제가 확정되었다. 정부 수립 과정에서 토벌을 일시 중단했던 군·경은 10월에 접어들자 본격적인 공세에 나섰다.

1948년 7월 11연대에 배속되었던 9연대(연대장 송요찬 소령)를 재편성하고, 11연대는 수원으로 철수하였다.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사령관 김상겸 대령)를 설치하여 대대적인 군경 합동 토벌 작전을 전개하였다. 10월 17일에는 9연대장 명의로, “10월 20일 이후 전도 해안선에서부터 5㎞ 이외의 지점 및 산악 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이 포고를 위반하는 자는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폭도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한다”는 포고문이 발표되었다.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회오리가 몰아치다]

10월 19일 ‘제주도 출동 명령’을 받은 여수 주둔 14연대 군인들이 출동을 거부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여순 사건은 미국과 대한민국 정부로 하여금 위기 의식을 느끼게 했다. 여순 사건 진압과 더불어 제주도를 향한 대한민국 정부의 대책은 선무를 무시한 무조건 진압이었다.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회오리가 몰아치기 시작하였다.

1948년 10월 이후 1949년 3월까지 약 6개월 동안 제주도 전역에 걸쳐 중산간 지대를 중심으로 군경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이 전개되었다. 이 시기에 중산간 지대의 민간인들에 대한 소개령(疏開令)이 내려지고 집단 학살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때 이전의 학살이 젊은 남자를 위주로 이루어졌던 반면, 11월 중순 이후에는 노인과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무차별적으로 행해졌다.

제주읍 내에서는 경찰 및 서북청년회가 지목하던 여러 관공리 및 지역 유지들이 농업학교에 잡혀가 아무도 모르게 희생되었다. 11월 9일 제주도청 총무국장 김두현이 서북청년회 사무실에 끌려가 구타 살해되었다.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는데, 이후 계엄령에 의거하여 중산간 마을에 대한 토벌대의 무차별 방화와 재판 절차도 거치지 않은 집단 학살이 전개되었다. 토벌대는 중산간에 사는 모든 주민들이 무장대에게 물자와 안식처를 제공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민간인들을 폭도로 취급하며 학살하였다.

1948년 12월 29일 9연대가 철수하고 함병선 중령이 지휘하는 제2연대로 교체되었다. 2연대는 초기에는 무장대를 산에서 내려오도록 설득하는 귀순 작전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얼마 없어서 강경한 토벌 작전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때 2연대는 주로 무장대와 연결되었다고 자체적으로 판단한 위에 해안 마을 주민들에 이르기까지 재판을 거치지 않고 상당수를 즉결 처단해버렸다.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이 죽어갔다.

1949년 4월 1일 미군 정보보고서에는 “9연대가 중산간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 학살 계획을 채택했으며, 1948년 한 해 동안 1만 5천여 명의 주민이 희생되었다. 그 중 80%가 토벌군에 의해 사살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부터 1949년 봄까지 겨우 몇 달 사이에 군·경 토벌대의 진압 작전으로 수만 명의 인명이 희생되었으며, 130여 마을이 소개령 등으로 초토화됨으로써 제주 공동체는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다.

1949년 3월 2일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유재흥 대령)가 설치되면서 마무리 진압 작전이 전개되었다. 군·경 토벌대는 중산간 지대에 대한 선무 공작을 펴면서 동시에 ‘빗질 작전’을 구사하며 잔여 무장대의 궤멸에 나섰다. 유재흥은 해안 마을에 주둔한 군대 병력을 산쪽으로 진출시켜 직접 무장대와 전투를 벌였다. 무장대와 전면전을 벌이는 한편으로는 귀순 작전을 펼쳐 중산간 지역 주민들에 대한 분별없는 살인을 중지하도록 하였다. 한라산 일대에 3월 초부터 귀순을 권유하는 삐라가 집중적으로 살포되었다.

“내려오면 살려 준다”는 선무작전에 따라 백기를 들고 삼삼오오 하산한 주민들은 제주읍 내 주정공장 등에 갇혀 있다가, 일부는 석방되고 상당수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군 당국은 원래의 회유 방침을 무시하고 강경한 처리로 일관하였다. 형량도 죄명도 모른 채 형식적인 군법회의를 거쳐 1,650여 명의 귀순자들은 제주를 떠나 육지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이러한 방침은 1949년 5·10 재선거 실시와 6월 30일 주한미군의 철수를 앞두고 사태를 신속하게 처리하려는 정부와 토벌 당국의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1949년 4월 9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루 일정으로 제주도를 방문하여 도민들을 무마하였다. 북제주군 갑·을 선거구에 대한 5·10 재선거는 무난하게 치러졌고, 5월 15일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는 해산하였다. 6월 7일 재산무장대 유격대장 이덕구가 사살되면서 무장대는 거의 궤멸되었다.

[죽음의 예비 검속이 단행되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내무부 치안국장 김병원은 즉각 각도 경찰국에 통첩을 발송하여 소위 ‘불순분자’를 잡아들이고 분류하여 군에 넘겼다. 군은 이들을 주민들이 모르는 장소로 끌고 가서 총살하여 암매장하거나 수장하였다. 물론 적법 절차를 밟은 것은 아니었다.

제주에서도 예비 검속이 실시되었다. 경찰 공문에 따르면, 1950년 8월 17일 당시 제주도 내 4개 경찰서에 예비 검속된 자의 수는 1,120명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7월 29일, 8월 4일, 8월 20일에 각각 서귀포, 제주항 앞 바다, 제주읍 비행장, 송악산 섯알오름 등지에서 집단적으로 수장되거나 총살·암매장되었다.

한국전쟁 직후 4·3과 관련된 학살은 제주가 아닌 전국 각지에서 또한 이루어졌다. 사선을 뚫고 살아나 일반 재판 및 군법 회의를 거쳐 육지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수천 명의 제주 출신 형무소 재소자들이 죽어갔다.

한국전쟁이 휴전협상이 무르익어갈 즈음 4·3도 막바지에 다다랐다. 1952년 제주도 경찰국은 100전투경찰사령부를 설치, 한라산 기슭 곳곳에서 무장대에 대한 토벌전을 벌였다. 1953년 1월 대유격전 특수 부대인 무지개부대(부대장 박창암 소령)가 한라산 작전 지역에 보강 투입되었다. 이제 재산 무장대는 극소수에 불과하게 되었다.

1954년 9월 21일 제주도 경찰국장 신상묵은 한라산 금족(禁足) 지역을 해제, 전면 개방을 선언하였다. 지역 주민들이 담당했던 마을 성곽 보초 임무도 없어졌다. 소개되었던 중산간 마을에 대한 복구 및 이주·정착 사업이 전개되었다. 1957년 4월 2일 최후의 무장 대원 오원권이 구좌면 송당 지역에서 생포되면서 4·3은 종식되었다.

2003년 10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확정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의하면, 4·3사건의 인명 피해는 25,000~30,000명으로 추정되고, 강경 진압 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으며, 가옥 39,285동이 소각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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