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17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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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蘊 |
영어음역 | Jeong On |
이칭/별칭 | 휘원(輝遠),동계(桐溪),고고자(鼓鼓子),문간(文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양진건 |
[정의]
조선 중기 제주도에 유배된 문신.
[가계]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고고자(鼓鼓子).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아버지는 정유명(鄭惟明)이며, 어머니는 장사랑 강근우(姜謹友)의 딸이다.
[활동사항]
1601년(선조 39) 진사가 되고,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임명되었다. 1610년(광해군 2) 별시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광해군 때 영창대군이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서 피살되자, 정항의 처벌과 당시 일어나고 있던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격렬한 상소를 올렸다.
광해군이 분노하여 이원익(李元翼)과 심희수(沈喜壽)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온을 국문하고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의 거처에 가시 울타리를 만들어 가두는 유배형)하였다.
인조반정 때까지 10년 동안 유배지에 있으면서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대정현감 김정원이 서재용으로 지어준 두 칸의 집에서 지방 유생들을 가르쳤고, 지방 사람들에게 예를 가르치고 애로를 해결해 주기도 하였다. 같은 시기에 유배된 송상인(宋象仁)·이익(李瀷)과 어울려 시문을 교류하였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축출되자 유배에서 풀려났으며, 광해군 때 절의를 지킨 인물로 평가되어 사간·이조참의·대사간·대제학·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언관에 있을 때는 인조반정 공신들의 비리와 병권 장악을 공격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행재소로 왕을 호종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는 이조참판으로서 명나라와 조선과의 의리를 중시하여 최명길(崔鳴吉) 등의 화의 주장을 적극 반대하였다.
강화도가 청나라군에 함락당하고 항복이 결정되자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수치를 참을 수 없다고 하며 칼로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죽지 않았다. 그 뒤 관직을 단념하고 덕유산에서 은거하다가 1641년(인조 19)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학문과 사상]
경상우도에서 명성이 높았던 정인홍(鄭仁弘)에게 사사하여 그의 강개한 기질과 학통을 이었다.
[저술 및 작품]
중국 은대로부터 남송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곤란과 우환을 당하여도 정도를 잃지 않았던 59인의 행적을 모은『덕변록(德辨錄)』과 『동계집(桐溪集)』이 있다. 덕유산에 은거하며 『속근사록(續近思錄)』을 찬집하려 하였으나 끝마치지 못했다.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정월 초하루 새벽에 「자경담」을 지었고, 「망북두시(望北斗詩)」와 「망백운가(望白雲歌)」를 통해서는 애군우국(愛君憂國)을 토로하였다.
[상훈과 추모]
숙종 때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1668년(현종 9) 귤림서원(橘林書院)에 배향하였으며, 이외에도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정온이 해배된 후 약 200년 뒤인 1842년(헌종 8) 대정현에 유배를 왔던 김정희(金正喜)가 제주목사 이원조(李源祚)에게 청하여 대정현 막은골, 지금의 안성리에 송죽사(松竹祠)와 유허비를 세웠다.
1963년 대정 지역 칠성계가 중심이 되어 정온의 비석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보성리에 있는 보성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겼다가, 1977년에는 보성초등학교 정문 앞으로 옮겼다. 정온의 생가는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강산리 50-1번지에 있으며 중요민속자료 제205호로 지정되어 있고, 유품은 중요민속자료 제218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