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17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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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容堅 |
영어음역 | Jang Yonggyeon |
이칭/별칭 | 익중(翊中),정산(庭山)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동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나영 |
성격 | 정의군수|항일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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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동 |
성별 | 남 |
생년 | 1869년 |
몰년 | 1928년 |
본관 | 인동 |
대표경력 | 정의군수|제주목주사|제주군주사 |
[정의]
조선 말기 정의군수를 역임한 관리이자 항일운동가.
[가계]
본관은 인동. 자는 익중(翊中), 호는 정산(庭山). 장규열(張奎烈)이라는 이름도 썼다. 아버지는 장현호(張炫昊)이다.
[활동사항]
김윤식(金允植)이 1896년 아관파천 후 제주에 유배되었을 때, 27세의 장용견과 교유하고 평하기를, “의(義)를 좋아하며 항상 귀양살이 하는 사람을 챙겼고 시회(詩會)에도 참가하였으며 어렵고 험한 일을 피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1900년(광무 4) 1월 27일 판임관 8등급인 제주목주사로 발령받았으며 1901년 9월 12일 물러났다. 1906년 11월 26일에 제주군주사로 재발령되었다. 1907년(융희 1) 4월 25일 채수강(蔡洙康)의 후임으로 정의군수에 임명되어 1910년 2월까지 재임하였다.
정의군수 재임 중에 군청 소재지인 성읍의 향사당(향청)을 중수하고 거기에 공립 정의보통학교의 전신인 사립 의명학교(義明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을 겸임하였다. 또 성산포에 양어장을 축조하는 등 주민들의 복리 후생에도 관심을 쏟았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 11월 17일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신이 정의군수 재임시 축조했던 성산면 오조리의 1만 5,000평의 양어장 터에 미간척 국유지 이용 계획 변경 허가를 받아 양어장으로 조성하여 1918년 12월 말까지 운영하였다.
민족 종교에 관심을 보여 1922년 제주성 내에 보천교의 정교부를 설치했으며, 1924년 3월 정교부가 진정원으로 승격되자 원장으로 부임했다. 문창래(文昌來) 등 4~5명의 간부와 함께 활동하면서 교세를 키웠나갔다.
민립대학 설립 운동이 한창 무르익을 때인 1923년 6월에는 양상룡(梁翔龍)과 더불어 ‘민립대학설립추진 제주도지부’ 창립 총회를 열고 그 후원자로 활동하였다.
1926년 7월 제주농업학교 1학년과 2학년 학생들이 동맹 휴학을 일으켰을 때, 일본 경찰은 주모자 7명을 구속하고 학교 측은 두 학년 학생 전원을 무기 정학시켰다. 이에 장용견은 장희순·채수용·홍순녕과 더불어 학부형 대표로 나서 일제 당국에 부당성을 호소하여 원만하게 해결하였다. 이들 4명은 당시 일제의 기피 인물로 제주를 대표하는 배일파(排日派) 민족주의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