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16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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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任徵夏 |
영어음역 | Im Jingha |
이칭/별칭 | 성능(聖能),서재(西齋),충헌(忠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양진건 |
[정의]
조선 후기 제주에 유배된 문신.
[가계]
본관은 풍천. 자는 성능(聖能), 호는 서재(西齋). 아버지는 집의 임형(任泂)이며, 어머니는 이의저(李義著)의 딸이다. 부인은 호조판서 김진구(金鎭龜)의 딸이다.
[활동사항]
1713년(숙종 39) 진사가 되고 이듬해 증광시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721년(경종 1)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일어난 신임사화로 삭직되었다가 1725년(영조 1) 노론이 집권하자 장령에 기용되었다. 당시 6개조의 소를 올려 탕평책을 반대하여 소론 탄핵을 주장하고 경종의 부덕함을 지적하여 영조의 분노를 사서 평안남도 순안에 유배되었다.
1727년(영조 3) 영조가 탕평책의 일환으로 노론 강경파를 파면하고 소론을 정권에 참여시킨 정미환국이 일어났다. 소론이 집권하자 임징하에 대한 형벌이 더욱 가혹해져 제주도 대정현으로 이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의 거처에 가시 울타리를 만들어 가두는 유배형)되었다.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임징하는 제주목사를 지낸 임홍망(任弘望)의 손자라 하여 제주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대우를 받았다. 임징하는 고영제의 집을 귀양지로 정하여 지방 자제들을 가르쳤고, 장인 김진구의 제자인 김덕항과 친교를 나누었다. 이미 유배와 있던 처남 김춘택(金春澤)과 교류하며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기도 하였다.
1729년(영조 5) 사헌부가 요청하여 역모의 죄명으로 다시 친국을 받게 되었을 때 끝까지 왕의 각성을 촉구하며 항거하다가 여덟 차례의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술에는 『서재집(西齋集)』과 『수안록(隨雁錄)』이 있다. 『수안록』은 첫 번째 유배지 순안에서 제주까지 오는 과정을 일기로 기록한 것인데, 기러기를 벗 삼아 걸었다 하여 『수안록』이라고 한다. 제주에서의 7개월이라는 짧은 유배기 동안 많은 한시를 남겼는데, 대표적인 것에 「감산칠가」가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충헌(忠憲)이며, 정조 때 관직이 복구되었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5대손인 임헌대(任憲大)가 1862년(철종 13)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서재 임선생 적려 유허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