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16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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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任觀周 |
영어음역 | Im Gwanju |
이칭/별칭 | 숙빈(叔賓)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양진건 |
[정의]
조선 후기 제주에 유배된 문신.
[가계]
본관은 풍천. 자는 숙빈(叔賓)이다. 아버지는 임섬(任暹)이며 어머니는 송필훈(宋必勳)의 딸이다.
[활동사항]
1756년(영조 32) 정시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767년(영조 43) 정언 재임 중 언론의 중요성, 『어제유곤록(御製裕昆錄)』의 불합리한 서술, 재상의 잦은 교체, 제술(製述) 시험 때 성균관 유생을 모독한 도승지 송영중(宋瑩中)의 파직, 서울과 지방 관원들의 비리 적발, 무장들의 권위 존중 등 10여 가지에 달하는 조목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로 인하여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제주도에서 창천촌에 유배지를 정하고 독서에 열중하였다. 유배된 지 두 달이 지나자 대신들이 바른 말을 하는 관리를 섬에 계속 둘 수 없다 하여 특별히 석방되었다.
1775년(영조 51) 사간 재임 중에는 무과 응시생 중에서 시험관을 모욕한 자에 대해 엄한 형벌을 주고 유배를 보낼 것을 주청하였다. 1777년(정조 1) 집의 재임 중에는 토역(討逆), 성균관의 개방, 과장(科場)에서의 부정행위 방지, 궁방(宮房) 시장(柴場)의 혁파, 북도(北道) 흉황과 관련한 함경도관찰사 조중회(趙重晦)의 파직 등을 주청하였다.
1782년(정조 6) 시폐(時弊)를 상소하자 대사헌 김이소(金履素)의 탄핵을 받아 흑산도로 유배되었다가 1784년(정조 8)에 남해현에서 풀려났다. 1801년(순조 1) 복관(復官)되었다.
[저술 및 작품]
제주도에서 유배가 끝난 후 제주도 산천을 두루 구경하고 많은 시를 남겼는데, 창천·산방산·용연·백록담 등지에 임관주의 시가 음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