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16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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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日本-濟州人-抗日運動 |
영어음역 | Ilboneseoui Jejuinui Hangil Undong |
영어의미역 | Jeju People's Anti-Japanese Movement in Japa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창후 |
[정의]
일제 강점기 일본에서 제주인들이 벌였던 항일 운동.
[개설]
일제 강점기인 1923년 12월 15일 제주도와 오사카 간에 정기 항로가 개설된 후 많은 제주인들은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갔다. 이러한 사람들 중 일부는 사회 단체나 학교, 노동 현장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해방될 때까지 치열한 항일 운동을 벌였다.
일본으로 진출한 제주인들은 오사카에 많이 거주하였으며, 주로 여성은 방직 공장, 남성은 노동 현장에서 일했다. 이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많은 돈을 고향에 송금해 제주 경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제주인들 중 일부는 각 분야에서 한국인, 혹은 일본인들과 힘을 합쳐 치열하게 항일 운동을 전개했다. 일본 검사국에서 펴낸 『사상 월보』에 따르면, “일본에 거주하는 제주인은 약 4만 명에 이르고 사상 운동에 종사하는 자는 약 300명에 달하고 있다”고 하여 많은 제주인들이 항일 운동에 나섰음을 알 수 있다.
[사상 운동]
1927년 좌우 합작으로 민족 단일당 신간회가 서울에서 결성됐다. 일본에서는 같은 해 도쿄, 오사카 등지에서 지회가 결성됐다. 오사카 지회에서는 김문준(金文準) 등이 활동했다.
한편 일제 강점기 항일 운동가들은 민족 해방 운동의 방편으로 공산주의 사상을 폭 넓게 받아들였다. 일본에서 한국인들은 조선 공산당 일본 총국, 고려 공산 청년회 일본부를 결성하여 한국과 연계하면서 활동을 펼쳤다.
1928년 코민테른이 ‘일국 일당주의’ 원칙을 발표한 후, 일본에서 활동하던 한국 및 제주도 출신의 항일 운동가들은 1931년경부터 일본 공산당 등 일본의 당조직에 합류해 1935년 일본 공산당이 궤멸될 때까지 많은 활동을 벌이다 검거됐다.
이들 중 제주인은, 김서호(金瑞鎬), 김태연(金泰淵), 강근생(康根生), 고진호(高珍浩), 현호경(玄好景), 강주호(姜周鎬), 이영복(李英福), 김만선(金萬先), 김경숙(金京淑), 현호진(玄好珍), 현상호(玄尙好), 강원범(康元範), 김태권(金太權), 고창옥(高昶玉), 김경득(金庚得), 한진섭(韓辰燮), 강상호(姜相鎬), 김암환(金闇渙)(일명 김은환), 김갑환(金甲渙), 한문택(韓文澤), 김귀영(金貴榮), 한봉삼(韓奉三), 김문옥(金文玉), 김병옥(金秉玉), 김광배(金光培), 김희봉(金喜奉) 등이다.
제주인들은 1933년 4월 재건된 공청 관서지방위원회 및 오사카 시위원회에서 활동하다 다수가 검거됐다. 이들은 정우생(鄭友生), 부덕환(夫德渙), 부장환(夫章渙), 김태휴(金泰休), 양기형(梁基亨), 송정권(宋政權) 등이다.
반제국주의 민족 독립 지지 동맹 일본 지부는 1929년 11월에 설립됐다. 당시 민족 독립 투쟁을 중시한 반제 동맹의 행동 강령은 한국·대만·만몽(滿蒙)의 해방과 관련되어 있어서 한국의 항일 운동가들이 가담한 경우가 많았다.
1931년 여름 오사카에서 오사카 지방 위원회를 설립했으나 곧 일제의 탄압으로 궤멸되고 동아통항 조합원 55명, 정우생(鄭友生), 강주호(姜周鎬), 박남호(朴南浩), 성자선(成子善), 고진호(高珍浩) 등 제주인들이 다수 검거됐다.
1930년을 전후해 오사카에서는 소비 조합 운동과 노동자의 자녀들을 위한 교육 운동, 민주 의료 기관 설립 등의 대중 운동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이중 소비 조합 운동이 제일 활발했다. 이 운동으로 일제에 검거된 제주인은 신대유(愼大有), 김서옥(金瑞玉) 등이다.
[노동 운동]
일제 강점기 일본에서 한국인들이 처한 노동 조건은 저임금과 함께 민족적 차별이 겹쳐 매우 열악했다. 항일 운동가들은 비참한 상황에 처한 한국인 노동자들의 권익 옹호와 민족 해방을 위해 1924년 2월 분산되어 활동하던 ‘조선 노동 동맹회’의 각 조직을 모아 ‘재일본 조선 노동 총동맹’을 결성하였다.
‘재일본 조선 노동 총동맹’은 1926년 10월, 가맹 조합 25개, 조합원 수 9,900명에 이르는 방대한 조직으로 성장했다. ‘재일본 조선 노동 총동맹’은 이러한 조직을 배경으로 재일 한국인 노동자의 권익과 단결을 증진시켰으며, 사상 단체 등과 협조하여 3·1 운동 기념일, 메이데이 투쟁, 조선인 학살 추도 행사 등 항일 운동에도 나섰다.
‘재일본 조선 노동 총동맹’의 활동이 왕성했던 곳은 조합원의 60%를 점유하고 있던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한신 공업 지대였다. 이곳에는 한국인 노동자, 특히 제주 출신 노동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한국인들이 노동 현장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 노동 운동에 앞장선 사람은 김문준(金文準)이었다. 그는 ‘재일본 조선 노동 총동맹’중앙 위원으로 오사카 지역 노동 운동을 지도하며 조몽구(趙夢九), 현호진, 김용해(金容海)들과 더불어 일제와 치열한 투쟁을 벌였다.
코민테른이 일국 일당주의를 표방함에 따라 1929년 12월에 열린 ‘재일본 조선 노동 총동맹’ 전국 대표자 대회에서는 ‘재일본 조선 노동 총동맹’을 해산하고 ‘일본 노동조합 전국 협의회[이하 전협]’에 각 산업별로 가맹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오사카에는 전협 산하의 각 산별 조합들이 들어서게 됐다. 김문준은 오사카의 중소 고무 공장 노동자 1천여 명을 끌어들여 1930년 초 ‘전협 화학 노조 오사카 지부’를 결성했다. 그러나 그는 그 해 6월 고무 공장 총파업을 지도하다 일제에 검거됐다.
그 후 김문준의 뒤를 이어 ‘전협 화학 노조 오사카 지부’를 이끌던 조몽구, 김서호 등도 1931년 8월에 모두 체포됐고, 그 외 섬유, 출판, 토건, 일반, 금속 등 각 산별 조합에서 활동하던 제주 출신 항일 운동가들도 이 시기에 대거 검거되고 말았다.
이렇듯 일제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사상·노동 운동을 통한 항일 운동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1935년 이후에는 대중 운동이 거의 궤멸돼 비밀 결사에 의한 소규모 항일 운동만이 해방 때까지 이어졌다.
[동아 통항 조합의 자주 운항 운동]
1923년 12월 15일 제주와 오사카 간의 직항로가 개설된 후 해마다 도항자가 늘어남에 따라 이 노선은 선박 업자들에게 황금 항로로 인식됐다. 1928년 이 항로를 독점적으로 운항하던 선박 업자들이 뱃삯을 대폭 인상했다.
이러한 뱃삯 인상에 큰 위협을 느낀 제주인들은 그 해 4월 도민 대회를 열고 뱃삯을 인하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선박업자들은 응하지 않았다.
당시 김문준, 문창래(文昌來) 등은 ‘우리는 우리 배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1930년 4월, 제주인 4,500명을 조직해 ‘동아 통항 조합’을 결성했다. 조합은 그 해 11월 1일, 교룡환을 임대해 뱃삯을 1인당 6원 50전으로 정하고 처녀 취항했다.
그러자 선박업자들은 뱃삯을 3원으로 인하해 대항했다. 조합은 이러한 선박업자들의 횡포에 ‘일시 싼 뱃삯에 속지 말 것’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운항했지만, 조합원 대부분이 노동자들이어서 이들만을 대상으로 자주 운항을 계속하기 어려웠다.
한국인들의 화물 운송도 수가 적어 곧 경영난에 봉착했다. 교룡환의 임대가 만료된 지 5개월 후, 선박업자들의 횡포와 일제의 탄압, 조합의 운영 미숙으로 손해만 보고 곧 운항은 중단되고 말았다.
동아 통항 조합은 1932년 4월 제주도민대회를 열어, 타 협동 조합의 적극 참여를 유도하고, 배를 직접 매입해 운항하기로 결정했다. 이어 모금 운동에 들어가 오사카 시내 13개 지부, 사카이[堺], 고베, 아마가사키, 시모노세키에 각 지부, 제주도 내에 17개 지부를 조직하고 조합원 1만 50명을 모집했다.
조합은 복목환[伏木丸: 1,300톤급의 영국제 강철선으로 정원은 800명이었다]을 구입하고, 1931년 12월 1일 승객 334명을 태우고 제주 항로로 처녀 취항했다. 이날 배에는 적기와 ‘우리들은 우리들의 배로’, ‘부르주아의 배에 타지 말자’, ‘복목환의 도항 저지 반대’라는 한글 구호가 걸려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운항도 순조롭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일제의 탄압은 극에 달해 첫 출항일에도 현장에서 100여 명을 검거했고, 제주도에서 도민들이 복목환을 타지 못하도록 했다.
또한 화순항에서 승객을 확보하던 조합원 7명을 검거하기도 했다. 결국 조합은 운항 기술의 미숙으로 첫 항해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1932년 4월에는 조난을 당했다. 조합은 다시 경영난에 빠지고 말았다.
동아 통항 조합은 1932년 5월 다시 제주도민 대회를 열어 타개책을 모색했다. 그러나 일제의 대회 방해와 조합 간부들의 검거로 대회는 순탄치 않았다. 이 대회에서 조합은 조합장으로 현길홍(玄吉弘)을 선임하고, 역원들도 개선했다.
대회 후 조합은 공격적인 경영으로 전환했다. 기관지 배포에 주력하고, 돌격대를 조직해 하루에 5명 이상의 새로운 조합원을 받아들이는 운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끝내 조합은 운항을 재개할 수 없었다.
계속되는 일제의 탄압과 함께 역원들간에 ‘계급 투쟁 단체로 유지하기보다는 순수 영리만을 위한 경영 단체로 해소하자’는 ‘방향 전환론’을 둘러싼 갈등 때문에 어려움을 겪다 1935년경에는 조합원도 급격히 줄면서 자연 해소되고 말았다.
[1930년대 중반 이후의 운동]
1930년대 중반 이후, 일제의 탄압이 강도를 더해가면서 대중 단체나 사상 단체를 통한 항일 운동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개인이나 소규모 비밀 결사만이 해방 때까지 항일 운동의 명맥을 이어갔다.
『민중 시보』는 1935년 5월 김문준을 대표 간사로 하여 창간됐다. 이 신문은 한글로 1935년 6월 15일 창간호를 낸 이래 월 2회, 1936년에는 월 3회씩 발행되다 그해 9월 20일 제27호를 마지막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됐다.
이 신문은 제주인들의 도항 문제, 셋방 문제, 친일 단체였던 내선 교풍회의 친화 정책 폭로, 친목 단체와 노동 단체의 단결 호소 등의 기사를 통해 일본 내 제주도민 사회의 사회상을 보여주기도 하고, 민족주의 단체를 간접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한편 『민중 시보』는 1936년 5월 26일 김문준이 감옥 생활의 후유증으로 사망한 후, 사위였던 이신형(李信珩)이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근무하다 폐간되면서 이신형은 한진섭(韓辰燮)과 함께 일제에 검거되어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았다.
성심야학교는 1934년 5월 이봉춘(李奉春)이 한국인들의 지원을 받아 오사카 시 히가시나리 구 이카이노 지역에서 개교하였다. 성심 야학교 개설 후, 이봉춘은 민족의식이 강한 교사들을 물색하여 김주삼(金柱三), 김성종(金性鍾), 고갑팽(高甲彭) 등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심 야학교는 무산자 자제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 청소년들에게 조선의 실상을 알리고, 민족 의식을 앙양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 우리 학교의 목표다.”
그 후 이들은 1942년 11월 검거될 때까지 11개 지역을 이동하며, 20~30명의 청소년들을 모아놓고 일본어와 산수를 가르치는 한편 비밀히 ‘조선 독립 창가’를 가르치는 등 민족 의식을 배양하는 교육을 했다.
한편 변시민(邊時敏)은 제4고등학교의 비밀 결사 ‘조선청년 마르크스주의 연구회’에서 활동하다 1941년에 검거됐다. 또한 항일 운동을 벌이다 송태옥(宋太玉), 고두평(高斗平), 현순창(玄順昌), 강태선(姜太善) 이공우(李公雨), 안치현(安致賢) 등이 검거되었다.
[의의와 평가]
일제 강점기 내내 재일 제주인들은 오사카 지역은 물론 일본의 전 지역에서 사상 단체나 노동 단체를 중심으로, 혹은 비밀 결사나 개인적인 항일 투쟁을 치열하게 벌였다.
그러나 이들의 투쟁이 한국 민족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막중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자료 부족 등으로 충분한 조사나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