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16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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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禬 |
영어음역 | Yi Hoe |
이칭/별칭 | 자방(子方)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찬흡 |
[정의]
조선 중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방(子方). 아버지는 관찰사를 역임한 이창정(李昌庭)[1573~1625]이다.
[활동사항]
1631년(인조 9)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예문관대교 등을 지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소현세자[1612~1645]가 인질로 청나라에 갈 때 세자시강원의 사서로서 따라갔다. 여러 지방의 수령을 지낸 후 1643년(인조 21) 4월 전라도 남원부사에 부임하고 1643년 12월에 파직되었다. 1648년(인조 26) 강릉부사로 있을 때 치적이 뛰어나 모범 관리로 표창을 받았으며, 1658년(효종 9) 4월에 제주목사에 부임하여 1660년(현종 1) 5월에 떠났다.
1658년 제주목사 재임 중 산마감목관(山馬監牧官)를 두었다. 김만일(金萬鎰)[1550~1632]의 셋째 아들 김대길(金大吉)[1608~1668]과 손자 김여(金礪) 두 사람이 말 280두를 헌납하자 김대길을 산마감목관에 임명하였다.
1659년(효종 10) 3월 온 섬이 춘궁기에 접어들자 세금을 반감시켜 주고 호남에서 쌀 1천 석과 영남에서 조 2천 석을 운송해와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였다. 1660년(현종 1) 장수당(藏修堂)을 건립하여 삼읍(三邑)의 자제를 교육하는 장소로 삼았으며 김진용(金晋鎔)을 교수로 임명하였다. 그 뒤 1664년(현종 5)에 광주부윤을 끝으로 관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작품으로 1660년에 장수당을 세울 때 지은 「장수당기(藏修堂記)」가 있다.
[상훈과 추모]
1669년(현종 10) 제주목사 이인(李堙)[1608~1669]과 유림이 장수당 동쪽에 세운 영혜사(永惠祠)와 귤림서원(橘林書院)의 별사에 제향(祭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