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16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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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最應永世不忘碑 |
영어음역 | Yi Choeeung Yeongse Bulmangbi |
영어의미역 | Memorial Stone for Yi Choeeung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2동 432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순만 |
성격 |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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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일시 | 1872년 |
관련인물 | 이최응(李最應) |
높이 | 200㎝ |
너비 | 74.5㎝[위]|70.5㎝[아래] |
소재지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2동 432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2동에 있는 조선 후기 이최응(李最應)이 제주 지역에 쌓은 공덕을 기리는 비.
[개설]
이최응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서 쇄국 정책에 반대했으며, 대원군(大院君) 실각 후 영의정이 되었다.
[건립경위]
이최응은 1877년(고종 14)과 1878년(고종 15)에 잇달아 흉년이 들자 임금에게 품신하여 호남사창미(湖南社倉米)를 제주도에 보내어 굶주린 백성을 살렸다. 또 어진 수령(守令)을 보내 기민구제(飢民救濟) 사업을 펼치도록 하였다.
과학(科學)과 관련해서는 제주 지역의 주호(州号)를 별서(別書)하도록 특전을 베풀었으며, 이를 악용하여 타도인이 제주인을 사칭할 경우 엄밀히 조사하여 처벌하였다. 이렇게 제주 지역을 위해 행한 큰 덕을 기리기 위하여 이최응 영세불망비가 세워졌다.
[형태]
비신의 경우, 높이가 186㎝, 너비 윗부분이 74.5㎝, 아랫부분이 70.5㎝이다. 두께는 윗부분이 30㎝, 아랫부분이 29㎝이며, 좌대는 높이 14㎝, 앞 너비 10.9㎝, 옆 너비 83㎝이다. 비의 높이는 지붕갓돌이 없는데도 200㎝나 되는 매우 큰 비석이다.
[금석문]
비 앞쪽에는 “영상이공최응영세불망비(令相李公最應永世不忘碑)”라 적혀 있다. 뒷면에 새겨진 비기(碑記)는 다음과 같다.
“성상(聖上)이 즉위(即位)하던 첫해 공(公)은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있으면서 임금의 뜻을 널리 백성들에게 알렸고 총리대신(總理大臣)으로 있으면서는 전 심력(心力)을 다하여 모든 일을 잘 처리하였는데 더욱 우리 제주도를 위해서는 각별한 배려가 있었다.
고종 14, 15년의 두 흉년에는 제주(濟州), 정의(旌義), 대정(大淨) 삼읍민이 모두 죽게 될 판이었는데 임금에게 품신하여 고남사창미(湖南社倉米)를 보내어 굶주린 백성을 살렸다.
또 어진 수령을 골라 보내어 상감의 뜻에 따라 기민구제(飢民求齊) 사업을 해내도록 하였으니 지금은 우리 고을이 오히려 잘 먹고 살 수가 있게 되었다. 이 마을이 이처럼 편안해진 것이 누구의 덕인가.
과학(科學)에는 제주의 주호(州號)를 별서(別書)하도록 하여 특전을 베풀었으며 이를 악용하여 타도인이 제주를 모칭(冒稱)하는 자가 있으면 엄밀히 조사 처벌하였으며 생원(生員) 진사시(進士試)는 우선 뽑도록 하고 무과합격자(武科合格者)로서 선전관(宣傳官)을 천학(薦學)하는 제도(制度)를 창시하였으며 무과(武科)에 사소한 내용까지 붙이게 하여 제주인에게 큰 덕을 베풀었다.
이 모든 것을 기록하여 비를 새기고 관아의 앞뜰에 세워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잊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굶주린들 누가 먹이며 은혜롭다 한들 누가 너에게 베풀 겠는가. 우리 임금은 위에 계시고 어진 재상은 이를 보필한다”는 이최응령상(李最應令相)의 찬양시(讚揚詩)가 새겨져 있다.
오른쪽 면에는 “숭정 오임신이월일(崇楨 五壬申二月日)”이라 되어 있어 1880년 7월 상순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제주판관을 지낸 송번순(宋袢淳)이 글을 짓고 진사(進士) 김량수(金亮洙)가 글을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제주도 내에 세워진 비들은 선정비(善政碑)나 공적비(功績碑)로, 대부분 목사(牧使)나 판관(判官)들의 비이다. 직접 목민관(牧民官)으로 부임(赴任)하여 정사를 맡아보지 않았던 사람의 비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사항으로 보아 이최응 영세불망비는 예외적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