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15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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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德九 |
영어음역 | Yi Deokgu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신촌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허호준 |
성격 | 유격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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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신촌리 |
성별 | 남 |
생년 | 1920년 |
몰년 | 1949년 |
대표경력 | 조천중학교 교사|제주도 인민유격대 사령관 |
[정의]
제주 4·3사건 때 제주도 인민유격대 사령관.
[활동사항]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장사를 하던 큰형 이호구 밑에서 둘째형 이좌구와 함께 공부하였다. 미오키모리국민학교와 상업고등학교를 거쳐 리츠메이칸대학 경제학과 4학년 재학 중에 학병으로 일본 육군에 입대해 광복과 함께 소위로 제대하였다.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 대회 이후 미군정과 우익 세력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반감은 커져 갔고,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제주도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기반으로 총파업, 동맹 휴교 등으로 맞섰다.
1948년 초 남한 단독 선거 감시를 위한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의 활동이 시작되면서 단독 선거를 둘러싸고 좌·우의 대립이 심해졌다. 특히 서북청년단 등의 패악이 심해지면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한라산을 거점으로 한 무장 투쟁에 돌입하게 되었고 이어 1948년 4월 3일 제주 4·3 사건이 발발하였다
이 시기에 고향인 조천읍에서 조천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조천읍 신촌리 사돈 집에서 숨어 지내던 이덕구는 한라산으로 입산해 제주도 인민유격대 3·1지대장을 맡아 제주읍과 조천읍, 구좌읍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8월 21일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김달삼(金達三)이 참석하러 가게 되자 이덕구가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군사부장과 제주도 인민유격대 사령관 직책을 이어받았다.
이덕구가 지휘하는 유격대 주력 부대는 토벌대를 포위해 기습 공격하고 제주읍을 급습해 도청을 방화하고 지서를 습격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러나 토벌대의 대공세 이후 힘을 잃어가고 있었고 무장 대원도 100여 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결국 1949년 6월 경찰과 교전을 벌이다 최후를 맞았고 효수된 머리는 경찰서 앞 관덕정 광장의 전봇대에 매달려졌다.
제주 4·3사건으로 이덕구 일가족 대부분이 희생되었다. 부인 양후상과 다섯살 아들 이진우, 두살 딸도 죽었다. 큰형 이호구의 부인과 아들, 딸, 둘째 형 이좌구의 부인과 아들, 사촌 동생 이신구, 이성구 등도 경찰에 의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