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15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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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蓍東 |
영어음역 | Yun Sidong |
이칭/별칭 | 백상(伯常),방한(方閒),문익(文翼)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찬흡 |
[정의]
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백상(伯常), 호는 방한(方閒). 윤세수(尹世綏)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윤득민(得民), 어머니는 조정빈(趙鼎彬)의 딸이다.
[활동사항]
1754년(영조 30)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756년(영조 32) 당론을 일으켰다고 탄핵을 받아 7년 동안 고향에서 지내야 하였다. 1765년(영조 41) 8월 교리 재임 중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1766년(영조 42) 6월까지 재임하였다.
제주목사 재임 중 자체적으로 마련한 466석으로 안민고(安民庫)를 설치하여 기민 구제에 이바지하였으며, 안민고에서 나온 모곡(耗穀: 백성에게 빌려준 곡식을 환수할 때 덧붙여 받은 곡식)을 여러 공용 및 잡역에 공급하였다. 또한 선비를 예의로써 대접하고 공무를 청렴결백하게 집행하여 여러 곳에 선정비가 세워졌다.
1766년(영조 42) 사간원대사간 재임 중 신광집(申光緝)의 무죄를 논하다가 고향으로 쫓겨났고, 1772년(영조 48) 갑산으로 유배되었다. 1776년(영조 52) 경기도관찰사 재임 중 당론을 언급하였다가 남해현에 유배되어 1777년(정조 1) 풀려났다. 이후 개성유수를 거쳐 형조판서 재임 중 다시 당론을 말하였다고 하여 삼화로 유배되었으며 1787년(정조 11) 풀려나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저술 및 작품]
편저에 『향례합편(鄕禮合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