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15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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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月刊濟州 |
영어음역 | Wolgan Jeju |
영어의미역 | Monthly Jeju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 |
유형 | 문헌/연속 간행물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일도1동 1412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문교 |
성격 | 잡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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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인물 | 오태현 |
창간인 | 오태현|안창남|이국진|강군황 |
발행인 | 오태현 |
판형 | 4x6배판 |
창간연도/일시 | 1968년 6월 1일 |
종간연도/일시 | 1993년 10월 |
총호수 | 175호 |
발행처 | 월간제주사 |
발행처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일도1동 1412|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노형동 939 |
소장처 | 제주대학교 중앙도서관 |
소장처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라1동 1[제주대학로 102] |
홈페이지 | 제주대학교 중앙도서관(http://chulic.cheju.ac.kr)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1968년 6월에 창간하여 1993년 10월에 종간된 종합 잡지.
[개설]
『월간제주』는 13년 동안 발행되다가 1980년 7월 통권 126호까지 발행하고, 언론 통폐합 조치로 폐간되었다. 그러다가 언론 민주화가 이루어진 1989년 1월 복간호를 발행하여 1993년 10월 통권 175호까지 발행하다 운영난으로 종간했다.
[창간경위]
『월간제주』는 언론계와 교육계를 거친 뒤 문학 활동을 하던 강군황(姜君璜)이 인쇄업을 하던 오태현(吳泰現)과 잡지를 발행하기로 협의하여 1968년 초 월간제주사(月刊濟州社)를 설립했다.
월간제주사는 발행인 오태현, 편집주간 강군황 체제로 1968년 6월 1일 『월간제주』를 창간했다. 그러나 『월간제주』는 경영난에 봉착하여 2개월 합병호를 내거나 격월간으로 발행을 하면서 명맥을 이어오다 1980년 7월 통권 126호까지 발행하고 언론 통폐합 조치로 강제 폐간되었다.
그러다가 6·29선언 이후 잡지 발행에 대한 자율성이 보장되자 1989년 1월 복간하여 1993년 10월 통권 175호까지 발행하다가 운영난으로 종간됐다.
발행 호수는 1980년 7월 통권 126호로 폐간되었다가 1989년 1월 복간 당시 통권 129호로 시작하여 2호수를 누락시켰기 때문에 실제로 발행된 총 호수는 173호이다.
[형태]
판형은 4x6배판이고, 지면은 50~60면 규모로 발행하다, 복간 후에는 110~130면 규모로 확대했다. 정가는 창간 이후 계속 100원이었다가 1974년부터 150원, 200원, 500원으로 인상했고 복간 후에는 2,000원이었다.
독자 확보를 위해 1969년에는 베트남 파견 장병에게 200부, 일본 오사카 거주 제주 지역 출신 교포들에게 50부씩 발송하기도 했다.
인쇄소는 발행인이 바뀌면서 성문인쇄사(成文印刷社)에서 태창인쇄사(泰昌印刷社)로 옮겨 인쇄했다.
[구성/내용]
『월간제주』는 “국가적 사명과 민족적 숙원을 성취하고 복지 제주, 낙원 제주, 관광 제주, 도약 제주, 문화 제주의 건설에 앞장서기 위하여 탄생했다”고 권두언을 통해 창간 취지를 밝혔다.
창간호의 주요 내용은 ‘역대 도백의 인물 총평’, ‘도지사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인사 행정에 공정하시길’, ‘제주도민의 주체 개발 문제’, ‘제주도 관광 개발의 문제점’, ‘윤락 여성의 선도 방안’ 등과 시, 수필 등 문학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신군부의 언론 정책으로 강제 폐간되었다가 1989년 복간한 복간호에는 뉴스와 화제로 ‘탑동 매립 사업’, 존 메릴의 강연 요지 ‘4·3은 반미 항쟁이다’, ‘선사시대의 제주도 동굴·바위 그늘 주거지’, ‘언론은 국민의 것이다’, ‘땅의 주인은 누구인가’ 등의 주제 기사를 특집으로 구성했다.
표지에는 주요 화제 인물의 사진을 넣어 인물지와 같은 편집을 시도했다. 편집 성향은 지역 정책 현안과 지역 작가들의 작품 등을 일관되게 실어왔으나 운영난을 겪으면서 내용의 다양성을 유지하지 못했다.
[변천과 현황]
창간 연도인 1968년부터 강제 폐간 전인 1980년까지 13년 동안 총 126호를 발행하여 연평균 9.6호를 발행했고, 복간 후 4년 동안에는 129호부터 167호까지 총 39호를 발행, 연평균 9호를 발행하여 운영이 순탄하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발행인은 오태현[1~151호], 안창남(安昌男)[152~173호], 이국진(李國鎭)[174~175호]으로 변경되었다.
편집책임은 주간 강군황[1~5호, 64~100호], 편집장 강영석(姜榮石)[6~21호], 편집국장 김동일(金東一)[101~126호]이 담당했고, 그 외 김영수(金永修), 이원창(李元昌), 강용준(康庸中) 등이 맡아왔다.
복간 후에는 주간 강영지, 편집국장 오영철, 출판국장 양영흠, 편집부장 강덕환, 문화사업부장 김순남 등이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