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15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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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元干涉期 |
영어음역 | Won Ganseopgi |
영어의미역 | Period of Yuan Interventi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김일우 |
[정의]
고려 후기 제주가 80여 년간 원의 지배를 받던 시기.
[개설]
제주는 남송과 일본을 잇는 바닷길의 요충지였다. 이에 원은 제주를 남송과 일본 정벌의 전초기지와 병참기지로 이용하기 위해 일찍부터 눈독을 들여왔다. 그러던 중 원은 제주에 들어와 웅거하던 항몽 삼별초를 1273년(원종 14) 고려와 연합하여 평정한 것을 계기로 이곳을 직할령으로 삼게 된다.
이후 원은 제주를 남송과 일본 정벌을 위한 전초기지와 병참기지로 활용하는 한편, 직접 목마장(牧馬場)을 마련하여 원 제국의 14개 국립 목장 중 하나로 키우면서 물자 수탈에도 초점을 맞춘 탐라 경영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하였다.
원 간섭기가 시작되면서 몽골 문화는 제주의 모든 영역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특히 제주어 가운데 말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용어에서 현재도 몽골어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영향은 막대하였다. 언어뿐만 아니라 의상과 실생활에서 쓰이는 용구들에서 80여 년간 지속된 원의 지배를 확인할 수 있다.
[이중 귀속]
두 차례의 일본 정벌이 실패한 후에도 일본 침략에 집착하던 원의 세조가 죽자 제주는 1294년(충렬왕 20) 바로 고려에 환속되었으나, 얼마 후 원에 다시 귀속되었다. 이렇듯 제주는 원 간섭기가 시작된 이후 80여 년간 수차례 고려와 원을 오가며 귀속되었다.
제주는 실질적으로 양국에 이중 귀속되는 미증유의 처지에 빠져들었으나, 그 가운데에도 원은 국립 목장에서 산출되는 말과 소·쇠고기·버터 등의 방물을 거두어 가는 등 물자 수탈에 중점을 둔 탐라 경영을 계속하였다. 이에 제주 사람들은 고려와 원에 내는 이중의 세금과, 제주에 온 고려 관리와 원의 탐라 경영에 종사했던 토착 세력의 수탈에 힘겨운 삶을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즈음 제주에는 상당한 수의 원나라 사람들이 들어왔는데, 1300년(충렬왕 26) 이후 고려 정부가 제주지역을 제주목과 15개 군현으로 분화·확대 편제된 것도 원 간섭기 동안 인구뿐만 아니라 경제적 규모가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고려의 반원정책]
공민왕대에 제주는 ‘하치〔哈赤〕’라고 일컬어지던 목호(牧胡) 세력이 장악하였다. 이들은 제주에 있던 원의 국립 목장에 배속되어 말과 소 등의 사육을 관할하던 몽골족이었다. 1356년 공민왕이 원이 쇠망해진 틈을 이용해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려는 반원정책을 단행하면서, 고려와 목호 세력은 제주의 관할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수차례 충돌하게 되었다.
초창기 목호 세력과 고려의 충돌은 원과 고려 사이에 형성된 긴장 관계의 정도에 따라 전개되었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목호 세력은 본국인 원의 지원이나 의사와는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고려에 맞섰는데, 여기에는 고려 조정이 파견한 관리들의 폭정과 수탈에 반감을 가진 제주 사람들이 목호 세력에 가세한 것이 큰 힘이 되었다. 이 때문에 원이 사실상 망한 이후에도 목호 세력과 고려의 충돌은 계속 이어졌다. 여기에는 원을 밀어낸 명나라가 중국의 새 주인으로 등장하던 원·명 교체기의 시대적 배경도 반영되어 있었다.
1374년(공민왕 23), 명나라가 제주의 말을 요구한 사건으로 목호 세력과 고려는 첨예하게 맞서며 총력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최영 장군이 고려군 총사령관으로 대규모 정예군을 이끌고 제주에 들어와 목호 세력과 최후의 결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이로써 목호 세력은 최후를 맞이하고, 제주는 커다란 희생을 겪은 뒤 이중 귀속의 처지에서 벗어나 고려에 재귀속되는 추세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