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14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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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湜 |
영어음역 | O Sik |
이칭/별칭 | 위숙(渭叔),임계(臨溪)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나영 |
[정의]
조선 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활동사항]
1409년(태종 9) 남원부사를 지냈으며, 1414년(태종 14) 윤임(尹臨)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고 1417년(태종 17) 3월 예조참의에 임명되어 떠났다. 이후 인령부윤·좌군총제(左軍摠制)를 거쳐 경주부윤 재임 중 사망하였다.
제주목사 재임 중 제주에는 한라산 북쪽 한 곳에만 관아가 있어 산남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관아를 왕래하는데 불편이 크고, 심지어 농사철에 관아를 왕래하는데 2~3일 정도 소요되어 농사 시기를 잃는 경우가 빈번하므로 이러한 불편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제주의 행정 구역 개편이 필요하다고 조정에 요청하였다.
이에 조정은 제주목을 제주목·정의현·대정현의 삼읍(三邑)으로 나누고 여기에 17개의 속현(屬縣)을 모두 소속시키도록 하였다. 즉, 제주는 동서로 길게 뻗어 외세의 침입에 방어가 어려우니 제주도 한라산 남쪽 2백리 땅을 동서로 나누어 동쪽을 정의, 서쪽을 대정이라고 하여 현을 두고 현감을 두어 다스리도록 하였다.
또한 1415년(태종 15) 4월에는 오식의 요청에 따라 제주의 수조법(收租法)이 정해져 토지의 등급에 따라 세금을 거두도록 하였다.
[저술 및 작품]
사부(詞賦: 운자를 달아 지은 한시의 총체)를 잘하였다. ‘해불양파삼년부(海不揚波三年賦)’라는 시제(試題)에 응시하여 삭과(削科)를 당하였으나 ‘석산래이흉용(昔山來而洶湧) 금지평이혼원(今地平而混湲)’이란 구절이 지금도 사람의 입에 오르내린다.
[묘소]
경상북도 구미시 무을면 무수동 월성마을에 있다.
[상훈과 추모]
1807년(순조 7)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면 망장리에 있었던 경락서원(景洛書院)에 위패를 모셨는데, 경락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 훼철되어 복원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