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13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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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御乘生水資源開發事業 |
영어음역 | Eoseungsaengsu Jawon Gaebal Saeop |
영어의미역 | Eoseungsaeng Water Resources Development Project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해안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고기원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해안동에서 시행되었던 고지대 수원 개발 사업.
[배경]
예로부터 제주 지역은 우리나라에서 강우량이 가장 많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물 빠짐이 특징인 다공질 화산암과 화산회토로 이루어져 있어 연중 흐르는 하천이나 큰 강이 없기 때문에 조상 대대로 심각한 물 부족을 겪어 왔다. 이에 따라 주민들은 물허벅으로 해안가 용천수를 길어다 먹거나, 마을 주변에 고인 빗물을 길어다 먹으며 살 수밖에 없었다.
1965년 8월 20일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현오봉 의원과 함께 방문한 자리에서 강우준 도지사에게 “집중된 수맥을 찾아 규모 큰 저수지 시설을 하고 필요한 곳으로 보낼 수 있도록 하되, 저수 시설까지는 정부 예산으로, 배수 시설 등은 교포의 투자로 하라”고 지시하는 등 제주 지역의 물 문제 해결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추진과정]
1. 사업 계획
제주도는 1966년 2월 2억 2000만 원을 들여 어승생·구십구곡·영실·성판악·홈골(발이악) 등 5군데 한라산 고지대 수원을 개발하는 계획을 수립, 정부에 대일 청구권 자금의 일부를 지원해 주도록 건의하였다.
1966년 3월 하루 용출량 5만 톤의 어승생과 3,000톤의 구십구곡(아흔아홉골) 수원을 모아 출력 600㎾의 수력 발전을 하고, 제주시와 애월읍 중산간 지대의 식수난을 해결하는 한편 광령수리조합에 수원을 공급하는 계획도 마련하였다.
고지대 수원 개발 계획은 1966년 5월 건설부와 협의를 거쳐 1967년부터 시작되는 제2차 5개년 경제개발계획 기간에 어승생에 3억 6000만 원을 들여 1,400㎾의 수력 발전과 제주시와 애월읍 중산간 지대 용수 및 관개용수를 공급하는 계획으로 구체화되었다.
1966년 6월 20일 제주 지역을 다시 방문한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제주 발전을 위해서는 수자원 개발이 필수적임을 강조하면서 ‘제주도 수자원개발 기본구상도’를 직접 스케치하여 고지대 수자원 개발 방안을 강구하도록 지시하였고, 이에 따라 어승생 수자원개발사업이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2. 1차 완공
1967년 4월 20일 당시 김윤기, 박경원, 정우식을 비롯한 각급 기관장과 주민 등 3,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저수용량 375,000톤의 어승생저수지 건설 기공식이 열렸다.
어승생저수지 건설 공사는 건설부가 주도했고 입찰로 선정된 삼부토건이 어승생저수지 본 공사를 맡는 한편 5·16 직후 전국 각지에서 검거된 폭력배 등으로 구성된 국토건설단이 도수로와 송수관 건설에 동원되기도 했다.
1968년 6월 24일 부산에서 1진으로 도착한 171명과 제주 지역 출신 39명 등 210명에 이어 6월 29일~6월 30일 2·3진 280명을 포함, 총 510명이 10월 25일 해단식 때까지 4개월간 공사에 동원됐다.
어승생저수지 건설 공사는 당초 5개년 계획으로 추진될 예정이었으나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2년이 단축된 1969년 10월 완공을 목표로 추진되었다.
1968년 12월 11일 제주시 회천동, 한림읍 금악리, 안덕면 덕수리에서 지선 포설 공사가 일제히 시작된데 이어 1969년 9월에는 어승생저수지 축조 공사가 완공되었다.
1969년 7월 11일 송수관에 물을 보내는 통수 시험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그해 10월 12일 제주시 산천단에서 구자춘, 양정규를 비롯한 각급 기관장과 지역 주민 등 5,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통수식이 열렸다.
3. 1차 보강 공사
어승생저수지의 축조 공사 과정에는 댐의 누수를 방지하기 위해 석축 위에 철판을 붙여 차수벽을 만들고, 어승생저수지 밑바닥의 누수를 방지하기 위해 점토를 다지는 동양 최초의 공법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법에 대해 관계자들은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1970년 8월 21일부터 구십구곡과 어승생에서 도수로를 따라 흘러내려온 물을 어승생저수지에 채우기 시작했는데, 8월 30일 오후부터 1일 5,000톤가량의 물이 댐 밖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조사 결과 어승생저수지 동쪽 모서리 부근 점토층에 직경 2m가량 구멍이 생겨 어승생저수지 바닥이 함몰되고, 5m 지하에 사람 머리 크기의 공간이 발견되었다. 이에 공사 관계자들은 이를 지하수층에 의한 함몰 사고로 판단하고 지하수로를 만들고 그 위를 철근콘크리트로 덮는 보강 공사를 1970년 10월 27일 완료하였다.
4. 2차 보강 공사
1970년 11월 5일 다시 어승생저수지에 물을 채우기 시작했으나 11월 6일 오전부터 1일 6,000톤가량의 물이 어승생저수지 밖 두 군데로 쏟아져 나왔다. 1차 누수 사고 발생 후 태풍 피해 시찰차 제주 지역을 방문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현장을 방문, 수행한 관계자들에게 밑바닥에 철판을 깔면 어떻겠느냐고 했으나 함몰 지구만 복구하면 성공할 수 있다던 장담이 무색해졌던 것이다.
이와 같이 두 차례에 걸친 누수 사고가 발생하자, 공사 관계자들은 서울대학교와 일본 동경대학교 지질학자들로부터 자문을 얻고, 다양한 방안을 검토한 끝에 1971년 3월 12~13일 건설부에서 열린 15인 복구대책위원회에서 댐 바닥을 암반층까지 3m를 더 파내 철근콘크리트로 보강하고 밑바닥에 코팅비닐(PVC)을 깔아 누수를 막기로 결론을 내렸다.
1971년 5월 5일부터 일본 기술진을 동원한 복구 공사에 착공해 10월 말 완료하고, 12월 3일부터 어승생저수지에 물을 채웠으며 더 이상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음으로써 저수용량 106,000톤 규모의 어승생 수자원개발사업이 마무리되었다.
총사업비 12억 원이 투자된 어승생 수자원개발사업은 두 차례에 걸친 어승생저수지 바닥 함몰 사고의 역경을 딛고 1971년 12월 준공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어승생저수지를 한밝저수지로 이름 붙였으며 지금도 수원지 입구에 표석이 세워져 있다.
[현황]
어승생저수지는 어승생 용수관리사무소, 제주도 자원관리사업소, 수자원개발사업소 등에서 관리해 오다가 2000년 10월부터 제주도 광역수자원관리본부(현 제주특별자치도 수자원본부)에서 관리하고 있다.
2006년 8월에 1일 15,000톤 처리 규모의 정수 시설을 설치하여 중산간 지역 21개 마을 및 60개 목장, 그리고 지역 주민 25,690명에게 정수를 공급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최대 10만 6000톤 저장 규모의 저수지, 구십구곡, 어승생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도수로 7.6㎞, 동쪽으로 구좌읍 대천동, 서쪽으로 안덕면 동광오거리까지 48.17㎞의 송수관로, 267㎞의 16개 지선을 통해 중산간 지대 67개 부락과 마을 공동 목장 등에 용수를 공급하는 어승생저수지 개발이 완료되면서 물 기근에 허덕이던 제주 지역에 상수도 혁명 시대를 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