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11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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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昭顯世子家族流配 |
영어음역 | Sohyeon Seja Gajok Yubae |
영어의미역 | Exile of Prince Sohyeon's Famil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동전 |
성격 | 유배사건|왕족유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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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연도/일시 | 1647년 |
종결연도/일시 | 1647년 |
발생(시작)장소 | 제주 |
관련인물/단체 | 인조|조소용|석철|석견|석린 |
[정의]
1647년 조선 중기 인조가 소현 세자빈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유배시킨 사건.
[개설]
조선 인조 때 소현 세자빈 강씨가 인조의 후궁 조소용(趙昭容)과 반목함에 따라 조소용은 세자빈이 왕실을 저주한다고 모함하였다. 결국 1646년(인조 24) 3월 소현 세자빈은 사약을 받고 죽었고, 다음 해인 1647년 5월 세자빈의 아들 삼형제까지 제주로 유배당했다.
[역사적 배경]
인조의 세자인 소현 세자는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9년 동안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다가 1645년(인조 23)에 귀국하였으나 병을 얻어 급사하였다. 그러나 소현 세자는 후궁 조소용을 총애한 인조의 방관에 의한 타살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세자가 죽자 소현 세자의 장자 석철(石鐵)이 당연히 세자의 뒤를 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인조는 봉림 대군(효종)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이를 반대하던 홍무적이 제주에 유배된 것도 이때이다.
[목적]
인조의 사랑을 받던 후궁 조소용은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기 위해 인조에게 소현 세자빈과 그 일파를 모함하였다.
[발단]
인조와 후궁 조씨에 의한 소현세자빈과 세 아들에 대한 탄압은 날이 갈수록 더욱 노골화되었다. 결국 1646년(인조 24) 3월 인조는 왕을 독살하려 했다는 죄명을 덮어씌워 세자빈을 폐출시키고 사약을 내려 사형시켰다.
[경과]
인조는 후일의 화를 두려워하여 1647년(인조 25) 5월 소현 세자빈이 낳은 세 아들 석철(石鐵)[12세]·석린(石麟)[8세]·석견(石堅)[4세]을 제주에 유배시켰다. 내통을 우려하여 이들 이외에 누구도 유배 적소를 출입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남 석철과 둘째 석린이 유배 1년 만에 유배 장소에서 사망하였으며, 인조는 이들의 시신을 한양으로 옮겨 소현 세자 묘 옆에 장사를 지냈다.
[결과]
인조의 뒤를 이어 효종이 즉위한 뒤 셋째아들 석견은 남해현·함양현·강화도로 유배지를 여러 차례 옮겨다니다가 효종 7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