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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1129
한자 成安義
영어음역 Seong Anui
이칭/별칭 정보(精甫),부용당(芙蓉堂)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나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제주목사
성별
생년 1561년(명종 16)연표보기
몰년 1629년(인조 7)연표보기
본관 창녕(昌寧)
대표관직 예조좌랑|성균관사예|영해부사|광주목사|성균관사성|제주목사

[정의]

조선 중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정보(精甫), 호는 부용당(芙蓉堂). 아버지는 참봉 성적(成績)이다.

[활동사항]

정구(鄭逑)[1543~1620]의 문인으로, 1591년(선조 24)에 식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정자(正字) 재임 중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인 창녕에서 충의위 성천희(成天禧), 유학 곽찬(郭趲)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약 1,000여 명을 거느리고 곽재우(郭再祐)[1552~1617]의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예조좌랑을 거쳐 1597년(선조 30) 사헌부지평, 1598년(선조 31) 성균관사예를 지냈다. 이후 영남조도사(嶺南調度使)가 되어 유성룡(柳成龍)[1542~1607]으로부터 세상을 구제하는 재간이 있다는 찬사를 받았다.

1600년(선조 33) 영해부사로 나아가 4년간 선정을 베풀었으며, 아버지의 병 때문에 창녕에 돌아갔는데 부모의 상을 연이어 당하였다. 복상을 마친 뒤 1607년(선조 40) 남원군수에 임명되었다.

1612년(광해군 4)에는 광주목사가 되었으나 소송 처리를 소홀히 하였다는 이유로 파직되어 영천으로 돌아가 13년 동안 한가히 지내면서 은둔하는 선비와 학문을 나누었다.

1623년(광해군 15) 성균관사성을 거쳐 상의원(尙衣院)·봉상시(奉常寺)의 정(正)으로 옮겼다가 이괄(李适)[1587~1624]의 난 때 인조를 공주까지 보호하며 따라갔다. 1624년(인조 2) 3월에 제주목사에 임명되어 1624년(인조 2) 6월 민기(閔機)[1568~1641]의 후임으로 부임하였다. 1627년(인조 5) 4월에 제주를 떠났으며, 1628년(인조 6) 승정원우부승지에 임명되었지만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에는 시문집 『부용당선생일고(芙蓉堂先生逸稿)』가 있다. 4권 2책으로 된 목판본으로 1824년(순조 24) 후손 성언강(成彦江)과 성수로(成守魯) 등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권 1에 시 16수, 소 1편, 계 21편, 권 2에 서 12편, 제문 3편, 권 3·4는 부록으로 행장·신도비명·묘지명·민사·제문·봉안문·축문·상량문·유사·장(狀)·증유시(贈遺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 가운데 「한강선생만사(寒岡先生挽辭)」가 훌륭하고, 「사광주목사소(辭光州牧使疏)」에는 겸양의 덕이 잘 나타나 있다.

연보와 부록은 비교적 상세하여 그의 일생과 학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특히 이현일(李玄逸)[1627~1704]이 쓴 신도비명, 이재(李再)가 쓴 묘지명에서 그의 학문과 경륜을 잘 살필 수가 있다.

[상훈과 추모]

이조판서·대제학에 추증되었다. 경상남도 창녕군의 연암서원과 물계서원에 제향되었다. 연암서원은 경상남도 창녕군 성산면 후천리에 있었던 서원으로, 1695년(숙종 21)에 지방 유림의 공론으로 이승언(李承彦)·이장곤(李長坤)[1474~1519]·성안의(成安義)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으며, 서원 터에는 유허비만 남아 있다. 성안의의 영정은 1997년 12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47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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