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0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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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珍景 |
영어음역 | Park Jingyeong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은희 |
[정의]
제주 4·3 때 사건 진압을 주도한 군인.
[활동사항]
박진경은 일본 오사카의 외국어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일제 말기에 제주도에서 일본군 소위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해방 후 국방경비대 사령부 인사과장을 거쳐 남한 단독 정부수립 반대를 명분으로 발생한 4·3사건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48년 5월 6일 김익렬 중령에 이어 제9연대장에 임명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으로 제주도에 복무한 경험이 있어서 섬의 지형과 산악 요새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진경은 취임 인사에서 "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천명할 정도로 미군정의 명령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러한 성격과 사상 때문에 전쟁도 아닌 시기에 제주도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펴려고 했다.
이런 초토화 작전의 공로로 제주 부임 한 달여 만에 대령으로 승진하게 되었다. 이 승진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술잔치를 마치고 제주농업학교에 있던 연대 본부 숙소로 돌아간 뒤 1948년 6월 18일 새벽 3시 15분 경 그의 무자비한 토벌 정책에 반기를 든 문상길 등 부하들에 의해 연대장 숙소에서 피살되었다.
[상훈과 추모]
제주시 충혼묘지에 박진경 추모비가 있다. 그의 고향인 경상남도 남해군에 1990년에 세워진 동상이 있다.
[의의와 평가]
빨치산 토벌 작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장렬하게 산화한 '창군 영웅'이라는 시각과 출세를 위해 무차별 토벌을 강행한 민족 반역자라는 시각이 공존하고 있다. 현대사 연구가 박명림은 박진경의 토벌 작전에 대한 평가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박진경의 이러한 무차별 체포 작전은 경비대의 힘을 과시함으로써 일반 민중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 유격대와 그들을 분리시켰으며 유격대를 더욱 깊은 산 속으로 몰아넣었다는 점에서는 성공이었다.
그러나 그의 작전은 민중들이 그때까지 갖고 있던 경비대에 대한 상대적 호감을 반감으로 전환시켰으며 경비대 내부를 동요시켰고 유격대에게 경비대도 경찰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적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 더 큰 대립과 갈등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들은 더욱 깊은 산 속에 몰아넣음으로써 사태를 오히려 장기화시켰다는 점에서 실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