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08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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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善陽 |
영어음역 | Park Seonya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나영 |
[정의]
조선 말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무신.
[활동사항]
1881년(고종 18) 5월에 백낙연(白樂淵)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여 1883년(고종 20) 5월까지 재임하였다. 1885년(고종 22) 충청도수군절도사를 지내다가 1886년(고종 23) 충청도병마절도사로 전보되었다.
『고종실록』과 『제주계록(濟州啓錄)』에 따르면 1881년 윤 7월 제주에서 공마(貢馬) 107필을 사복시(私僕寺)에 보내었다. 1881년 추자도는 어업이 생업인데 요역(徭役)에 응하는 외에 영암군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가 해마다 심해져 제주목에서 관할하도록 의정부에 상신하였다.
1881년 10월 표류하다가 건입포(建立浦)에 정박한 청나라 산둥성(山東省) 사람 15명과 서양 사람 1명을 제주판관 이학선(李學善)의 주관 하에 육로로 떠나게 주선하였다. 1881년 11월 명성황후의 추종 세력을 몰아내고 왕으로 추대되려다 발각되어 제주에 유배된 흥선대원군의 서자 이재선(李載先)[?~1882]을 사사(賜死)하였다.
1882년 봄 전임 제주목사 백낙연(白樂淵)이 기금을 모아 관덕정(觀德亭)을 중창하려 하였는데 전출되자 박선양이 완성하였다. 1882년 9월 명월진 문루(門樓)와 성첩(城堞: 성 위에 덧쌓은 낮은 담)의 수리를 3개월 만에 완성하였고, 감독관 명월만호 김문주(金汶株)[1859~1935]의 포상을 상신하였다.
낡은 관덕정을 외국 표류인의 연회 장소로 사용하기 위하여 1여년 만에 개건 공사가 끝나자 감독관 박래민(朴來敏), 전 제주판관 김동표(金東杓)·강이철(康履綴)[1809~1890]·이능(李陵) 등에 대해 표창을 상신하였다.
1882년 6월 함경남도병마절도사 이태현(李泰鉉)이 탐학죄로, 10월에는 백낙관(白樂寬)[1846~1883]이 제주목에 각각 유배되었고, 12월에는 윤상화(尹相和)를 제주목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였다.
1883년(고종 20) 3월 명월만호 김문주가 신병으로 사임하고, 산마감목관(山馬監牧官) 김봉신(金奉信)이 신병으로 물러나자 김만일(金萬鎰)[1550~1632]의 후손 김완초(金完礎)에게 맡겼다.
[상훈과 추모]
1883년(고종 20) 5월 공적비가 세워졌으며, 박선양의 글씨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오라동에 있는 방선문(謗仙門)의 바위에 음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