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07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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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道培 |
영어음역 | Mun Dobae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1222 |
시대 | 근대/근대 |
성격 | 항일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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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1222 |
성별 | 남 |
생년 | 1908년(순종 2) |
몰년 | 1953년 |
본관 | 남평 |
대표경력 |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구좌면위원장|구좌면 인민위원회 위원장 |
[정의]
일제강점기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
[활동사항]
1927년 3월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였다. 1930년 3월 신재홍(申才弘)·오문규(吳文奎)·강관순(康寬順)·김성오(金聲五)·김순종(金順鐘)·김시곤(金時坤)·부대현(夫大炫) 등은 문도배의 집에서 혁우동맹을 조직하였다.
1930년 11월 초순 혁우동맹 조직이 발각될 위험에 처하자 1931년 1월 하순 해체를 논의하여 1931년 4월 혁우동맹을 해체하였다. 혁우동맹 해체 후 1931년 5월 조선공산당 제주도 야체이카(사회주의 운동의 세포 조직)가 새로 조직되었고, 제주도 야체이카 구좌 지역 담당자 신재홍은 1931년 7월 오문규와 문도배를 당원으로 가입시켰다.
문도배는 신재홍·강관순·김순종·김시곤 등과 회합하여 1930년 11월 초순 사회 운동의 방략에 대해 논의하였다. 1931년 후반부터 해녀들의 관제 해녀조합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에 청년 운동가들은 야학을 통하여 부녀자들을 지도하여 1932년의 해녀 항일 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1932년 1월 해녀 1,000여 명이 참여하는 항일 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전 제주도에 걸쳐 청년 운동가 100여 명을 체포하였다. 문도배도 이 일로 체포되어 1933년 2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아 항소하였고, 1933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받았다.
광복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구좌면위원장과 구좌면 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46년 10월 미군정이 정권을 인도하기 위해 설립하였던 과도적 성격을 띤 입법 기관인 남조선과도입법의회 의원 선거에서 김시탁과 함께 당선되었으나 11월 남조선과도입법의회 참여를 거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상훈과 추모]
200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