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05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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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板 |
영어음역 | deokpan |
영어의미역 | fishing boat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물품·도구/물품·도구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집필자 | 김동섭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원양 어로와 연륙선·진상선으로 사용했던 목판배.
[개설]
덕판은 구실잣밤나무로 만든 제주 지역 전통의 목판배이다. 연안에 서식하는 어류와 해조류를 채취하고 가까운 섬을 오가는 배가 ‘테우’였다면, 덕판배는 먼 바다로 나아가 고기를 잡거나 연륙선·진상선으로서 활용할 만큼 튼튼하게 만들어진 목판배였다.
서진의 사학자 진수(陳壽)가 『삼국지(三國志)』의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에서 “배를 타고 중한(中韓)을 왔다갔다하면서 무역을 한다.”고 기록하고 있고, 8~9세기경에는 당나라 최대 무역 상대국의 하나로 탐라국이 거론될 정도로 제주 사람들은 예부터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을 자랑했는데, 그 바탕에는 제주의 전통 배인 덕판이 있었다.
‘싸움판배’ 또는 ‘당도리배’라고 불렸던 제주 배, 곧 덕판은 조선 배보다 날쌔고 일본 배보다 견고해서 해전에 유리한 갑판선(너장배)이었다. 이는 덕판이 제주 연안의 암석 해안을 고려하여 배의 맨 앞부분 이물의 상부에 두툼한 나무판인 ‘덕판’과 그 밑으로 통나무 보호대를 가로로 대어 웬만한 충격도 흡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하대학교 선박공학과 연구팀의 조사에 의하면, 이러한 뱃머리 구조로 인하여 덕판은 5톤 이하의 소형선으로 제작할 수밖에 없으나 내파성, 즉 높은 파도에 기울어졌다가 복원되는 안전성이 오늘날의 3만 톤급 상선보다 높다고 한다.
[연원 및 변천]
덕판은 제주 연안에서 해산물을 채취하거나 자리돔 등을 잡는 데 주로 이용하였던 ‘테우’에서 발전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덕판은 원양 어선이나 연륙선으로서의 기능 외에 해전용으로서도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선덕여왕(善德女王)이 변방의 아홉 개 나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운 황룡사 9층 목탑의 4층이 탁라(托羅)[탐라]를 상징했을 정도로 제주 사람들의 원거리 항해와 해전 능력은 탁월했던 듯하다. 제주 배를 ‘싸움판배’ 또는 ‘당도리배’라고 불렀던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고 할 수 있다.
덕판은 확실한 명칭은 없으나 고려 시대에 제주에서 배 두 척을 진상했다는 기록이 보이며, 몽골이 일본 정벌을 위해 제주에 배 1백 척을 짓도록 요청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조선 수군 역시 덕판을 모방하여 병선(兵船)을 만들려고 했던 기록이 있는데, 이는 모두 거센 파도와 암석에 강한 제주배의 기능을 인정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덕판은 1939년까지 21척이 남아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어선 개조 정책과 과다한 건조 비용 등이 문제가 되면서 사라지기 시작하여, 해방 당시 우도에 한 척 남아 있던 것마저 사라졌다. 현재 1996년에 재현한 덕판배가 국립제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형태]
덕판은 약 5통 미만의 소형선으로 제주 지역에서 ‘자배낭’이나 ‘조밤낭’ 등으로 불리는 구실잣밤나무로 제작되었다. 섬유질이 강한 솔피나무로 ‘피새’를 만들어 이음 부분을 연결했고, 이물의 상부에 두툼한 나무판인 ‘덕판’과, 그 밑으로 통나무 보호대를 가로로 대어 웬만한 충격도 흡수할 수 있게 만들었다.
또한 돛이나 노, 키 등 모든 동력원이 기능을 상실했을 때 배가 안전하게 표류하도록 대나무로 만든 부동식 닻인 ‘풍’을 장착하여 원거리 항해에서의 안정성을 확보하였다.
[생활민속적 관련사항]
1996년에 덕판 복원에 참여했던 고 김천년 옹이 기록한 자료를 보면, “피새는 오줌을 받아 뒀다가 썩으면 그 오줌에 나무를 삶은 후 다시 맹물에 삶은 나무로 만들었다.”고 기록한 것이 보인다.
썩은 오줌에 나무를 삶은 것은 질기고 썩지 말라는 뜻이고, 맹물에 다시 한 번 삶은 것은 냄새가 나지 말게 한다는 뜻이라 한다. 배 한 척을 짓기 위해서 한라산에서 1년 동안 나무를 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또한 덕판을 이물에 대어 제주 연안에서의 자유로운 항해와 원양에서의 안정성을 확보한 데서도 알 수 있듯, 덕판은 제주 바다가 갖는 지역성을 철저하게 반영한 배로서, 옛 제주인의 조선술의 수준을 가늠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