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0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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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章煥 |
영어음역 | Kim Janghwa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허호준 |
성격 | 항일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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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
성별 | 남 |
생년 | 1902년(고종 39) |
몰년 | 미상 |
본관 | 김해 |
대표경력 | 경성청년연합회 집행위원|『동아일보』 기자 |
[정의]
일제강점기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
[개설]
본관은 김해. 항일운동가인 김시학(金時學)[1881~1949]의 장남이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활동사항]
1919년에 일어난 조천 3·1만세운동은 서울의 휘문고등보통학교(휘문고등학교의 전신)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조천 출신 김장환이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귀향하면서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조천에서는 이미 김시범(金時範)[1890~1948], 김시은(金時殷)[1887~1957] 등이 전국 각 지역에서 독립을 선언하는 시위가 일어나고 있음을 듣고, 독립운동을 모색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3·1운동에 참여하다 3월 5일 이후부터 시위자 색출 작업이 강화되자 3월 12일에 고향으로 갈 것을 결심하고 3월 16일에 고향에 도착하였다. 이때 독립선언서를 갖고 들어와 숙부 김시범을 만나 서울의 시위 상황을 전하였고 김시범과 김시은도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만세 운동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김장환은 제주에서의 만세운동을 결심하게 되었다.
김장환은 김시범, 김시은과 함께 3월 17일에 조천리 미밋동산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고 동지 규합에 나선 결과 3월 19일까지 14명이 규합되었다. 이에 따라 3월 21일 아침 조천 미밋동산에는 14명을 비롯하여 조천리 주민과 인근 함덕·신흥·신촌리 등 주민 150여 명이 모였다.
이후 500여 명으로 시위대가 불어났고, 오후 3시쯤에는 미밋동산에서 김시범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김장환의 선창으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시위대는 김시범, 김시은, 김장환, 황진식(黃鎭式)[1900~1976] 등 4명의 주도 하에 제주성내를 향해 행진하였고, 신촌리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중 체포되었다.
조천 3·1만세운동으로 김장환은 1919년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 이날 같이 만세운동을 모의하거나 주도한 김시범 등은 징역 1년에서 6월까지 징역형을 받았다.
만기 출감 후인 1925년 8월 3일에는 서울 서린식당에서 14개 청년단체 대표 50명이 모여 조직한 사회주의 청년운동 단체였던 경성청년연합회의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동아일보』 기자로도 활동하였다.
이후 1934년 서울에서 부인 김명순(金命順)이 숨지자 평양 출신 김혜원(金惠媛)과 재혼한 뒤 1944년에 평양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조천 3·1만세운동의 주도 세력은 청년층이었다. 형을 선고받은 주도자 23명 가운데 20~30세에 해당하는 사람이 19명으로 청년을 중심으로 한 운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주도 세력의 직업별 분포도 농업 14명, 상업 5명, 교사 1명, 학생 1명, 용인 1명, 무직 1명 등으로 나타나 제주3·1운동이 계급적 한계를 극복한 민중운동이었음을 말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