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03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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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時範 |
영어음역 | Kim Sibeom |
이칭/별칭 | 선구(善驅),양오(養吾)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허호준 |
성격 | 항일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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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
성별 | 남 |
생년 | 1890년(고종 27) |
몰년 | 1948년 |
본관 | 김해 |
대표경력 |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조천면위원장|민주주의민족전선 제주도부의장|조천면장 |
[정의]
일제강점기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
[개설]
본관은 김해. 자는 선구(善驅), 호는 양오(養吾). 김진호(金振鎬)의 4남이며, 김주호(金周鎬)에게 입양되었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활동사항]
제주시 조천의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1일부터 24일까지 4차례 걸쳐 연속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지역도 조천에서 함덕·신흥·신촌 등으로 확대되었다.
최초의 거사일은 유학자로 존경받았던 김시우(金時宇)의 제삿날인 3월 21일에 맞춰 김시범이 김시은(金時殷)[1887~1957]과 함께 거사계획을 수립하여 3월 21일에 시위를 주도하였다.
김시범은 김시은과 함께 조선 각처에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음을 알게 되자 제주도에서도 이 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김장환(金章煥)[1902~?]에게 부탁해 독립만세라고 쓴 기 4개를 가지고 3월 21일 미밋동산(조천만세동산)에서 1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기를 세우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마을을 행진하였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항소해 1919년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김시은과 같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20년 4월 8일에 만기 출소한 뒤 동지 14명이 동미회(同味會)를 조직하고, 첫 사업으로 25세의 나이로 요절한 항일운동가 백응선(白膺善)[1896~1920]의 묘비를 건립하였는데, 이때 김시범은 비문에 일제의 연호가 아닌 단기 연호를 썼다.
이후 김시범은 김연배와 함께 사숙(私塾)이나 야학을 통하여 후배들을 가르쳤으며, 조천 소비조합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광복 이후 미군정기인 1945년 9월부터 1946년 7월까지 조천면장과 1945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조천면위원장, 1946년에 결성된 좌익세력의 통일전선체였던 민주주의민족전선 제주도부의장을 각각 역임하였다.
1947년에 일어난 3.1절 기념 시위사건으로 미군정에 검거되었으며, 1948년 11월 25일에 부인 신경보(愼敬輔)와 함께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