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03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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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錫允 |
영어음역 | Kim Seokyu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동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한금실 |
성격 | 승려|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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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동 |
성별 | 남 |
생년 | 1877년 |
몰년 | 1949년 |
본관 | 광산 |
대표경력 | 관음사 소림원 주지|제주교구 고문|백련사 주지 |
[정의]
일제강점기 제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1887년 제주 광양서재 김병규 문하에서 통감, 사서, 사략 등을 사사하고 1891년에는 같은 광양서재에서 김설월에게 금강반야경을 마쳤다. 18세가 되던 1894년에는 전주 위봉사에서 박만하를 은사로 출가하였다.
1898년 해남 대흥사에서 내전 초등과를 수료하였고, 1902년 통영군 용화사에서 사교과를 수료하였다. 1916년 범어사에서 이회현 강백을 스승으로 대교과를 수학하였다. 김석윤은 4·3 사건 시기인 1949년에 입적하였으며 묘소는 오동동 병문천 서쪽에 위치해 있다. 근대 제주 불교의 중흥에 앞장선 승려이자 제주의 의병 활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였다.
[활동사항]
1898년부터 1902년까지 제주 광양서재 등의 교사로 취임하여 활동하였고, 안봉려관과 함께 관음사와 법정사 창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김석윤은 1908년 전라남도 장성에서 항일 의병 활동을 하던 기우만과 긴밀히 연락하던 중 1909년 고사훈을 만나면서 급진전되었다.
제주성 밖 광양동의 대장간에서 무기를 제조하고 황사평에서 군사 훈련에 돌입하는 한편, 자신이 초안한 격문을 제주 전 지역에 보냈다. 그러나 사전에 기밀이 누설되어 거사는 실패했다. 김석윤은 광주지방재판소 검사국으로 송치된 후 내란죄로 10년 유배형을 받았지만, 제주의 유지들이 적극적으로 탄원에 나서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1909년 7월에는 관음사 서무로 취임하였고, 1911년에는 관음사 내에 있던 해월학원 교사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1930년경에는 오라리(현 제주시 오라동)에 제주 최초의 근대 선원인 월정사를 창건하였고, 이후에도 토산·하례·한동·평대·금릉 등지에 사찰을 건립하였다.
1945년에는 관음사 소림원 주지, 제주교구 고문을 역임했으며, 1946년에는 김녕 백련사 주지를 맡기도 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 독립유공 대통령 표창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