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03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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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奉南 |
영어음역 | Kim Bongnam |
이칭/별칭 | 김영근,김재성,천근,봉남 |
분야 | 종교/신종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조성윤 |
성격 | 신종교 창립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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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제주도 북제주군 구좌면 연평리 우도 |
성별 | 남 |
생년 | 1898년 |
몰년 | 1950년 |
본관 | 미상 |
대표경력 | 찬물교 교주 |
[정의]
일제강점기 제주 출신으로 찬물교를 창립한 인물.
[개설]
본명은 김영근(金永根) 또는 김재성(金再星)이며, 자는 천근(天根), 호는 봉남(奉南)이다. 1898년 4월 11일 제주도 북제주군 구좌면 연평리 우도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였다.
1912년 위장 계통의 괴질에 걸려 고생하다가 자살을 기도하였다. 신병 치료를 목적으로 한때 보천교(普天敎)·무량교(無量敎) 등의 종교 단체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1916년 집을 나온 김봉남은 부산시 동래구 기장군에 있는 해녀들의 작업 배에서 사공일을 하였다. 1921년 제주도 출신의 출가 해녀인 문씨와 결혼하였다.
[활동사항]
1928년 오대산에서 도인을 만나 안찰(按擦)과 침구(鍼灸)의 비법을 전수받아 다른 사람의 병을 치료해 주었다.
1936년 무량교(無量敎)를 믿던 황보흠(皇甫欽)을 만나 본격적인 수련을 시작하였으며 부산시 동래구 기장군 영화산에서 독자적인 구도행에 들어갔다. 그 결과 1937년 하늘로부터 물법을 받으면서 핏덩이를 토하고는 괴질이 나았다고 한다. 이것이 세 단계의 깨달음 중 첫 번째 단계인 초통(初通)이었다.
김봉남의 도력에 관한 소문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교단이 형성되었다. 김봉남은 포교 활동의 방법으로 부처님 앞에 찬물을 올리고 신도들에게 ‘아미타불’, ‘미륵존불’을 큰소리로 반복시키고, 『무량주(無量呪)』, 『태을경(太乙經)』 등을 외우도록 하였다.
1943년 부인의 소상(小祥) 때 강신(降神)이 되면서 중생을 삼고(三苦: 굶주림·추위·질병)에서 해탈케 하는 심수법(心水法)의 원리를 터득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세 단계의 깨달음 중 두 번째 단계인 재통(再通)이었다. 이후 교인들로부터 수선법사(水仙法師)·태상상제(太上上帝)·생불(生佛)의 화신으로 추앙받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포교 활동을 잠시 중지하였다.
1945년 해방 후, 부산을 중심으로 다시 포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물 한 그릇으로 장님이 눈을 뜨고 정신병과 나병도 나았으며 죽은 사람까지 살린다는 소문이 퍼지자 수백 명의 신도들이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서 제주도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1946년 김봉남은 천일기도를 마친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물법을 전수하였으며, 이 날을 찬물교의 물법교화일이라고 한다.
1948년에는 경상북도 상주시 성지산에서 백일 기도에 들어가 천지의 대행대덕(大行大德)을 통하고 심수법의 근원인 영해영국(靈海靈局)을 관통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세 단계의 깨달음 중 마지막 단계인 삼통(三通)으로 이때 물법이 유·불·선 삼교 합일의 귀일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후 경상남도 김해시를 중심으로 수만의 신도를 확보하며 교세를 확장해 나간 김봉남은 1950년 4월 8일 53세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